[신간회][신간회 창립][신간회 결성과정][신간회 활동과 조직화][신간회 해소]신간회의 역사적 의의, 신간회의 창립, 신간회의 결성과정, 신간회의 활동과 조직화, 신간회의 해소
- 최초 등록일
- 2013.03.01
- 최종 저작일
- 2013.03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5,000원
목차
Ⅰ. 서론
Ⅱ. 신간회의 역사적 의의
Ⅲ. 신간회의 창립
Ⅳ. 신간회의 결성과정
1. 자치론의 대두
2. 조선공산당의 협동전선론
Ⅴ. 신간회의 활동과 조직화
Ⅵ. 신간회의 해소
Ⅶ. 결론
본문내용
초기 노동단체의 성격은 계(契)나 친목회와 차별성이 없고 노무공급기구에 머문다거나 중간 관리자의 인신적 지배가 강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계몽과 의식의 강화, 연대성과 단결을 강화하는데 기여한 면도 간과할 수 없다.
노동단체 성격에 관한 언급은 조선노동공제회(이하 공제회)에 대한 성격규명에서 비롯한다. 북한학계의 권의식은 1961년에 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의 역할을 평가하는 연구에서, 공제회가 본래적 의미의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이해했다. 즉 공제회가 현대적 산업프로레타리아의 조직이 되지 못하였고, 서울을 비롯한 산업 중심지에서 발생한 노동조합을 통일결속하지 못했으며,
<중 략>
그러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사와 천도교 신파의 사람들인 최린, 이종인, 김성수, 송진우, 최원순, 신석우, 안재홍, 박등빈, 이승훈, 서상일, 조만식 등 16-7명이 모여 구체적으로 조직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모임에 앞서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 대한 반응이 나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연정회는 타협적인 자치권 획득운동을 이끌어 가고 자치를 담당할 단체로서 구상되었다. 안재홍은 연정회 조직 계획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민족주의 좌파는 1925년 9월 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하여 결속을 꾀한다. 여기에는 백남훈, 백남운, 박찬희, 배관수, 홍성하, 김기전, 김준연, 한위건, 홍명희, 조병옥, 유억겸 등이 참여하였다.
<중 략>
그러나 신간회는 식민지조선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요구에 응하여 조직차원에서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도할 수 있는 단체는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민족운동사상의 과제는 이러한 신간회를 민족적, 계급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간회 창립시 표방했던 `정치적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로 전환시켜 나가는 일이었고 해소운동에는 그러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소운동이 곧 신간회의 해체가 되고 말았던 것은 해소론자들의 오류였으며 민족운동 역량의 커다란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김준엽·김창순(1979~80),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집 1~2권,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미즈노 나오끼(水野直樹)(1988 봄호),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론과 신간회운동, 역사비평 2호
스칼라피노·이정식(1983), 시련의 시기―신간회, 신간회연구, 동녘
이균영(1990), 신간회연구,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정용욱(1989 겨울호), 신간회 조직의 한계와 반제민족통일전선, 역사비평 7호
차기벽(1985), 민족협동전선의 시각에서 본 신간회운동,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 정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