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3.01.17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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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동법
목차
1. 머리말
2. 대동법 실시 이전의 수취제도
3. 대동법 시행의 사회·경제적 배경
1) 방납의 폐해
2) 소작제의 발달
3) 재정궁핍
4) 공부부담의 불균형
5) 교환경제의 발달
4. 대동법의 실시범위
5. 대동법의 내용
6. 대동법의 의의
7. 맺음말
본문내용
대동법은 기존의 특산물로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되고, 국가의 수입이 매우 감소된 시기에 비로소 시행되었는데,영의정이원익이1608년(광해군 즉위년) 음력 5월에 중앙에 선혜청(宣惠廳), 경기도에 경기청을 두고 방납의 폐해가 가장 큰?경기도부터 시작하여,24년(인조 2) 강원도, 51년(효종2) 충청도, 58년(효종 9) 전라도, 77년(숙종 3)에는 경상도에 시행되었으며,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 이를 모방한 상정법(祥定法)이 시행되기까지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었다.
<중 략>
병자호란 전후 대동법의 경장론이 일시적으로 제기되었다. 집권세력간의 대립에 의해 경장론은 인조대에는 실시되지 않았다. 그 동안 지방에서는 지주들의 이익과 방납인들의 이권이 계속 추구되었다. 한편 농민들의 유망이 심화되고 전토에서 이탈된 농민들이 조직적인 저항을 하였다. 남방토적이라 불리는 이들로 남방토적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효종대의 기록이지만 `이제 만약 그 일당(남방토적)을 모두 제거하면 남아 있을 백성이 없을 것(효종실록 7, 효종 2년 7월 己亥)이라는 사실에서 농민의 실상을 추측할 수 있다.
<중 략>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거의 파탄상태에 빠졌던 왕조의 재정사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게 했고, 공부 수탈을 통한 관료층의 횡포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농민경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대동법을 도입함으로써 대동미를 통한 국정운영이 이루어지고 공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게 된다. 대동미를 통한 조세의 일원화를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세의 일원화는 근대 금납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에 대동법 실시는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대동법은 상품화폐경제의 기반을 달성했다는데 하나의 큰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