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13.01.01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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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를 9페이지가량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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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카이사르의 초기생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은 오랜 기간 고위 공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카이사르의 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유력 씨족과는 달리 공화정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었고, 다른 씨족에 비해 공화국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적지만 율리우스 씨족이 매우 전통 깊은 씨족이라는 사실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인척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무려 7회나 집정관을 역임했던 고모부 마리우스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그가 16세 되던 해 사망했고 가문을 책임지게 된 카이사르는 킨나의 딸, 코르넬리우스와 혼인했다. 당시 킨나는 로마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평민파를 제압하고 원로원 귀족파의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술라의 잔혹한 숙청이 카이사르에게도 위협으로 다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 략>
암살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이 대다수였었는데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그가 보인 제정으로 가는 행보에 대해 심한 실망감일 것이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의 부패가 극에 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타도하는 것에 대해 지도층의 젊은 자제들의 지지는 대단했었다. 실제로 카이사르 밑에서 싸운 원로원급 젊은층의 대다수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패한 원로원을 타도하자 나타난 것이 왕정이나 다름없는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였고 이에 대한 젊은이들의 실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카이사르 암살에 협조하게 된다.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암살 서술-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향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다.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뺏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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