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고증학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2.12.02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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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목차
Ⅰ.머리말 P2
Ⅱ.고증학파의 형성과 사회배경 P3
1.청조의 문화통제정책과 새로운 학풍 P3
2.청대 고증학 발달의 원인 P4
Ⅲ.청대 고증학의 발전 P5
1. 청대 경세학과 고증학의 개척자 P5
2. 고증사학의 발전 P6
Ⅳ.고증학의 의의와 한계 P7
1.고증학의 의의 P7
2.고증학의 한계 P7
Ⅴ.맺음말 P8
Ⅵ.참고문헌 P8
본문내용
Ⅰ.머리말
중국의 마지막 봉건 왕조인 청(淸)은 만주의 여진족 중에서 조선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건주위(建州衛)가 중심이 되어 건국한 후금(後金)을 이은 것이다. 청은 1644년부터 1911년까지 268년 동안 전 중국을 지배하여 중국 역대의 이민족 통치 가운데서는 가장 오랜 기간을 존속하였다. 소수 민족이 세운 청이 이토록 오랫동안 중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청의 중국 통치는 원대의 통치와 큰 차이가 있었다. 원은 전 시대를 일관되게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구분하여 중국 문명에 동화하는 면이 매우 적었고, 적어도 과거 제도가 부활되기 전까지는 역대 중국 학문의 주류였던 유학도 매우 경시하였다. 그러나 청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청대의 전반기에 각각 60년 정도씩 장기간에 걸쳐 재위했던 강희(康熙) 및 건륭(乾隆) 황제는, 이전의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중국의 전통적 학술을 적극적으로 보호 장려하고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윤리 도덕을 일반 국민에게 보급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들 황제 자신이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중 략>
이에 대해 절서하파는 고염무에서 시작되어 서건학⋅고조우⋅호위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역사학의 임무가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사실의 진위를 가리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절동학파의 실증주의 사학과 절서학파의 고증주의 역사학을 집대성한 이가 장학성이다. 그는 한 대의 유향⋅유흠 그리고 唐代 유지기의 영향을 받고 六經皆史 六經은 모두 역사이다
는 주장을 내세워 經書에 대한 유가의 신성불가침적인 통념을 타파하였다. 그리하여 6경은 다만 3대(夏⋅慇⋅周)의 道를 전할 뿐이고 그 이후의 道는 史(역사)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학계에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문사통의』에서 역사란 단순한 사실기록에 그쳐서는 안 되며 역사 속에 잠겨있는 원동력과 원칙을 추구하는데 사학의 근본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학정신은 청대 고증사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은 고증사학의 발전은 자연히 역사지리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조우의 『두사방여기(讀史方輿紀要)는 역사책에서 지리관계의 기사를 수집, 조사하여 지리적인 연혁을 서술한 것이다. 또 고염무가 지은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는 정치지리서로서 역대 행정제도의 변천에 따른 지리형세를 기술하였다. 한편 서양문물의 유입과 함께 해외에 대한 인식이 넓어짐에 따라 세계지리책도 나오게 되었는데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출판되어 중국인의 지리적 시야를 넓혀주었다.
참고 자료
오이환, 「동아시아의 사상」, 2003년, 예문서원
신채식, 「동양사개론」, 2006년, 삼영사
존 K 페어뱅크외, 「동양문화사(상)」, 2001년, 을유문화사
이춘식, 「중국사사설」, 2005년,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