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발전과 멸망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12.11.15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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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금관가야 병합에 따른 대가야의 발전과 멸망까지의 양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였습니다.
목차
Ⅰ.머리말
Ⅱ.大加耶 연맹체의 탄생과 발전
1) 대가야 연맹체의 성립
2) 낙랑·대방군 축출과 가야국의 변화
3) 4~5세기 대가야의 발전
Ⅲ.新羅의 대외팽창과 대가야 복속
1)신라의 팽창과 대가야 진출
2)關山城 전투의 재조명
3)신라에 의한 복속
Ⅳ.가야 문화와 그 영향
1)가야의 철기문화
2)우륵의 신라 ‘投我’
Ⅴ.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가야연맹체는 소국연맹체의 형성시기 당시 신라와 백제와 자웅을 겨루는 존재였으며,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로로서 해상왕국의 전성기를 누리던 존재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야연맹체는 ‘포상팔국의 난’에 의해 금관가야 세력이 약화되고 이때 5세기를 시점으로 하여 대두되는 나라가 바로 大加耶이다. 다수의 논문들을 살펴봤을 때 5세기의 대가야 발전·멸망과정, 三國의 관계사, 백제·왜 와의 관계사적인 입장의, 가야의 입장보다는 강대국들의 입장에서 스러져 가는 촛불과 같은 나라로서 표현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5세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발전양상을 보이면서 급부상하였고 신라와 백제의 완충지대에 존재하였으며, 두강국을 시기 적절하게 이용함으로서 외교적인 수완과 국가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얻으려 했던 영리한 나라였다. 또한 가야가 가진 철의 왕국이라는 칭호는 당시 가야국이 철기에 대한 기술이 타국보다 월등히 발전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가야가 관산성 전투에서 받은 타격으로 인해 백제가 대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 급속한 합병으로 손쉽게 흡수하였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이 논문에서는 위와 같은 입장과는 다르게 관산성 전투의 전개를 재구성하여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 세력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재구성 하고자 하며 통합 전·후 그 영향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1장에서는 ‘낙랑·대방군 축출’을 기점으로 왜 당시 맹주국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있던 금관국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대갸야의 부상 배경을 관산성 전투에서의 성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기록에 남겨진 전장 상황의 의문점에 대한 재조명과 신라에 의한 복속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 당시 기록을 대조하여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가야의 복속 전·후에 발달하였던 철기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력과 우륵의 투아 배경, 그리고 신라 대악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