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쟁 독립군의 배경
- 최초 등록일
- 2012.10.18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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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산리전쟁 독립군의 배경과 관련된 글입니다.
근대역사개론 수업에서 A+ 받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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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0년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조국을 찾으려는 운동이 여러 형태로 일어났다. 이 운동의 추진세력은 무력의 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경제력을 포함한 총체적인 실력의 양성이고 그와 함께 반드시 의식 또는 정신의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혁명운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남북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그들의 족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들을 이끈 지도층은 근대문명과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이고 근대적 개혁을 해야 하지만, 외부세력에 의존해선 안 되고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운동 기지건설의 초기 형태는 을사조약 이후에 나타났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된 것은 민족운동을 국외로 돌리게 하였다. 서간도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건설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구체화되었는데, 이 해 8월 하순, 이희영과 그의 동지 이동녕, 장유순, 그가 데리고 있던 소년 이관식은 상인으로 가장하여 서간도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로써 서간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적극 추진되었다. 안동 및 경북지방에서도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관한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위정척사의 의병장이 많고 유림이 강한 영향력을 가진 안동에서 혁신유림, 지사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면 우선 그 지역의 정부가 그것에 호의적이거나 그 지역에 대한 통제가 심히 약화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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