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서울대학교 2011-S 인물로 본 한국사, 박헌영의 대미인식 변화와 관련한 보고서
목차
I. 머리말
II. 박헌영의 대미 협조노선의 형성 배경
(1) 해방 과정의 불완전성과 독립 노선의 수동성
(2) 미국 뉴딜주의자에 의한 새로운 국제 질서의 구축
III. 반미공세로의 박헌영의 대미 인식 변화
(1) 미∙소 협조 노선의 동요, 그리고 미군정에 대한 불신
(2) 미∙소 공동위원회의 무기 휴회
(3)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정판사 사건)
IV. 박헌영의 대미 인식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평가
(2) 긍정적 평가
V. 맺음말
VI. 참고문헌
본문내용
I. 머리말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박헌영만큼이나 극적인 삶을 살았고, 좌우 진영 양측에서 모두 비판 받는 인물은 드물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그와 대립하여 오던 제국주의 세력이나 분단 세력이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의 동지였던 김일성 세력에 의해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살았던 삶의 극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남한의 우파진영에서도, 해방 이후 한반도의 공산화를 지향했고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에도 지하의 남로당원을 동원하여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달성하려 했던 ‘반체제인사’로 박헌영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중 략>
이러한 박헌영의 대미인식의 변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미•소 협조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기대로 인한 상황 판단의 오류로 조선공산당을 대중과 현실로부터 유리시켰다고 비판한다. 또한 체포령에 대한 보복심리적 성격으로 대미 협조 노선을 갑작스럽게 변화시킴으로써 조선공산당의 활동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세력의 와해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강조한다. 이에 반하여 박헌영의 대미인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박헌영의 대미인식이 당시 미•소 양국 간의 국제 질서를 파악하여 최적의 선택을 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대미 협조 노선을 지향했다고 하여, 이를 미국의 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무의식”이라고 치부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상반되는 평가 중 박헌영의 대미 인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은 결과론적 차원의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헌영의 대미 인식은 실제로 조선공산당과 후에 결성된 남조선로동당의 정치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헌영의 대미 인식은 당시 우리 민족의 힘으로는 실질적인 파시즘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힘들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하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의 대미 협력 노선은 실패로 종결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의 지향에 있어서는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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