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의 활동과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2.09.07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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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활란의 생애와 활동,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생애
3. 활동
1) 민족주의 활동
2) 교육활동
3) 근우회
4) 반민족행위
5) 해방 후 활동
6) 여성운동
4.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과거 역사 속에서 여성도 남성과 함께 활동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은 아주 특이한 경우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지위는 선사시대에 농경이 시작된 이후부터 점점 하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교의 종법과 내외법으로 여성의 활동에 제약이 가해질 정도로 하락하게 되었다. 또한 하락한 여성의 지위의 영향은 현대사회에까지 여성차별로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하락한 지위로 인해 여성들은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 많이 있었고, 현재도 있다.
일제의 지배하의 암흑기인 1931년 10월,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가 탄생하였는데,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이었다. 김활란은 한국여성교육의 산 역사인 ‘이화’의 대명사이자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인물이다. 구한말에 태어나 여성교육의 발전과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 계몽, 구국운동, 국제외교, 사회봉사 등의 여성운동가로써, 교육자로써, 종교인으로 다방면에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적으로 인한 오점은 김활란을 후대에 친일자로 낙인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후대에 민족운동을 한 김활란과 친일행적을 한 김활란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활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생애
김활란은 1899년(고종 36) 인천에서 김진연(金鎭淵)과 박또라(朴萄羅)의 8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호는 우월(又月), 초명은 기득(己得)이며, `활란`이라는 이름은 세례명 헬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여덟살 때 인천 영화소학교(永化小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07년(융희 1) 아홉살 때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였다. 이화학당의 초·중·고등과를 거쳐 1918년에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유학해 1924년 웨슬리언대학, 1925년 보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참고 자료
김정옥, 《이모님 김활란》 정우사 1977.
박용옥외,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하》한국여성개발원 1998.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새로 밝혀 다시 쓴 친일인물사》 개마고원 1999.
윤정란,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 연구>《숭실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2000.
이혜정, <일제 말기 김활란의 일제 협력 배경과 논리> 《여성학논집》21 2004.
「매일신보(每日申報)」1938년 6월 9일자.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2650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