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련의 생애와 회화형성 배경 및 추사 김정희의 영향, 회화활동의 의미와 작품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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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치 허련의 생애와 회화형성 배경 및 추사 김정희의 영향, 회화활동의 의미와 작품경향에 대한 17쪽 분량의 레포트입니다.목차
I. 머리말II. 허련의 가계와 생애
1. 가계와 성정
2. 생애
1) 초기(출생∼32세)
2) 중기(32세∼49세)
3) 후기(49세∼86세)
III. 허련 회화의 형성 배경
1. 윤두서의 영향
2. 초의선사의 영향
IV. 김정희와 허련
1. 김정희의 서화관
2. 김정희의 영향
3. 자연과의 일체 추구하는 남종화
V.허련의 회화활동과 의미
1. 19세기 서울의 서화시장과 서화애호 풍조의 확산
2. 허련 회화활동의 의미
VI. 허련의 작품경향
1. 산수화
2. 인물화
3. 사군자와 모란
4. 기타(지두화 등)
VII. 맺음말
<참고자료>
본문내용
Ⅰ. 머리말소치 허련은 19세기 조선의 서화에서 장승업과 함께 가장 주요한 화가로 평가된다. 허련은 군주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김정희의 문하에서 가장 인정을 받은 화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인에서 궁궐문인화가들까지 허련의 문하에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서화와 문화계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대표적인 작가가 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가 중국의 남종 문인화를 모범으로 한 것에 비해 허련은 김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회화 제작경향을 지방으로 특히 호남일대를 중심으로 파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허련의 일생과 회화활동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시골출신 화가가 그림솜씨만으로 입신하고 화명을 떨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조선 문화계의 변화하던 실상과 서화제작과정 등의 단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허련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 살펴보고 회화의 형성 배경과 김정희와의 관계, 허련의 작품경향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II. 허련의 가계와 생애
1. 가계와 성정
허련의 본관은 양천이다. 양천 허씨 가문은 우의정, 좌의정, 대학자, 서화가 등을 배출하는 명문가로서의 전통을 지켜왔다. 허련은 1808년 오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대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허련의 선조는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의 하나로 꼽히는 전라남도 진도로 이주하였다. 진도로 이주한 양천 허씨들은 가세가 몰락하여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허씨가 진도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당쟁의 피해에서 벗어나고자 진도로 이주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구체적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진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도서로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곳이며 많은 인물들이 유배되어 ‘유배지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허련이 당시 주요 유배지 가운데 하나인 진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인격 의식 형성은 물론 일생 전반에 지속적인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궁벽한 섬이라는 문화적 소외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앙의 문화계와 화단을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김정희와 같은 대학자의 높은 평가는 한없는 자부심이 되었고 일생을 방랑과 같은 주유를 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허련의 풍채와 용모는 정인보의 말을 빌어 알 수 있다. “허련의 체격은 보통이고 눈은 작은 편이었으나 수업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허련의 초상화는 이 전언과 부합된다. 허련의 초상화는 간략한 선묘 위주로 된 소조 형식의 초상화로서 이러한 형식은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이러한 ‘소조’식 초상화 역시 김정희를 중심으로 청대 문인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선물 받은 작품이 몇 점 유입되었을 뿐 지속적인 유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정희가 허련의 회화에 끼친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허련의 성정은 현대적 기준에서 볼 때 다소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일생의 스승 김정희에대해서는 충실한 제자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정성을 보인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세 번이나 찾아가 모셨고 70세 때에는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하는 등 스승을 기리는 노력을 한다. 김정희가 허련을 높이 평가한 것이 물론 그림 솜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정실적 측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들게 한다. 여러 명사들과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며 교유하는데 노경에 들어서도 계속적으로 교유를 이어가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명사들에 대한 허련의 대인관계나 처세는 매우 원만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소치 허련(1808-1893)의 생애와 회화활동 연구 김상엽 2003.02 성균관대 대학원소치 허련의 회화와 후대에 미친 영향 정영자 2005.02 수원대 대학원
소치허련 김상엽 학연문화사 2002
http://blog.daum.net/ahra1072/7172471
http://sochi.koreanarts.net/navigator.php?contents=board&usemode=view&DB=106&no=2&range=0&keyword=&keymode=
http://www.uriul.or.kr/zeroboard/zboard.php?id=ds_sansung&no=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