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 최초 등록일
- 2012.08.03
- 최종 저작일
-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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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우구스투스가 프린키파투스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프린키파투스 확립과정
2-1. 아우구스투스와 임페라토르의 보유
2-2. 종신 호민관의 권한 보유
2-3. 종신 콘술의 임페리움 보유와 국부 추대
3.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카이사르가 공화파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로마 귀족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그의 재정적, 정치적 후계자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정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친인척이라는 사실 외에는 로마 귀족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심지어 귀족 신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훗날 로마의 전권을 장악하고 제정 로마시대를 여는 초대 황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그의 여러 과정을 거쳐 점차 신체제를 향한 확고한 기반을 다져갔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탁월한 정치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투스가 프린키파투스라는 신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중 략>
그는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아 프린키파투스의 토대를 공고히 했으며 아그리파와 딸 율리아 사이의 아들 가이우스로 후계자를 확보하였다. 또한 그는 평민 지지에 힘입어 원로원의 의석을 800에서 600으로 대폭 줄였다. 이 과정에서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원로원을 사회적 특권 신분으로 만들고, 원로원 신분에 대한 재산자격을 인상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재정적 도움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그들과의 수직적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20인을 모체로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차출해 자신의 정치세력의 기반으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년에 콘술직의 임기를 1년에서 6개월 이상으로 기간을 단축시켜 가급적 많은 엘리트들이 콘술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임기가 단축된 콘술일지라고 종전의 콘술과 다름이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이 직접 생애 12번째의 콘술이 되고 기원전 2년, 6개월로 최종 확정되고 1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콘술이 된다. 또한 그의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공적인 정치활동에 나서게 하였다.
참고 자료
김진경 외, <서양 고대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2003
허승일 외, <로마 제정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허승일, <로마 공화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