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최초 등록일
- 2012.06.23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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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부의 집중과 공납ㆍ군역의 과중
1) 토지집중과 상업발달
2) 농민의 부담 과중
3) 임꺽정 일당의 폭동과 정여립 반란
2. 사림의 등장과 사화, 당쟁
1) 사림의 등장
2) 훈척과 사림의 갈등 - 사화
3) 선조대 붕당의 발생
4) 서원과 향약
3. 16세기 사림문화
1) 성리학의 철학적 심화와 분화
2) 새로운 사서의 간행
3) 어문학의 변화
4) 그림과 공예
4.나가는말
5.참고문헌
본문내용
1. 부의 집중과 공납ㆍ군역의 관중
1) 토지집중과 상업발달
토지의 편중을 완화하고 관인과 농민의 자립기반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던 과전제도가 16세기 들어와 무너지면서 토지겸병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통제경제와 시장경제의 균형이 시장경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분배정의는 후퇴했으나 지주제하에서도 농업생산력은 높아져 갔다.
우선 왕실이 토지겸병에 나서는데 원래 왕실경비는 내수사로부터 얻은 수입으로 충당되었는데, 그 수입을 장리(長利)라는 고리대로 재산을 늘려갔다. 특히 연산군 때 내수사 재산은 더욱 늘어나고 백성의 원성도 높아갔다. 내수사는 토리뿐 아니라 산림, 어장, 목장, 하천까지도 겸병하여 왕실은 제일 큰 부자로 떠올랐다.
세조 때 실시된 직전제1)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완전히 폐지되면서 녹봉에 의지한 생활에 곤란을 느낀 관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유지를 확대해갔다. 특히 명종 대 문정황후의 오라비 윤원형(尹元衡)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 서해안일대의 해택지(海澤地)2)를 개간하였다. 겸병현상은 민전(民田)에서만 아니라 관둔전(官屯田)3)에서도 나타나고 산림, 어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토지 겸병으로 서울의 양반들뿐 아니라 큰 상인이나 토호 중에서도 대지주가 생겨났다. 토기 겸병이 성행하면서 병작관계는 더욱 확대되고 농민의 계급분화가 촉진되었으며 국가의 전세수입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 대부분이 상업으로 이직하였고, 곡물매매를 전업으로 하여 돈을 모은 큰 상인도 생겼다. 부상대고(富商大賈)4)로 불리는 상인들은 골물의 방납(防納)을 통해서도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며, 중국과의 사무역을 통해서도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중종 때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와 척신인 윤원형 같은 이는 대외무역에 참여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은 인물들이다.
지주제와 상업의 발달은 농민뿐 아니라 중소지주까지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소지주 출신 사림(士林)중에는 천방(川防)과 보(洑)의 축조를 통해 관개농업을 발전시켜 생산력을 높여 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권신과 척신의 탐욕으로 해를 입은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대항하였는데, 명종(1545~1567)때 임꺽정(林巨正)일단의 도적활동은 그러한 농민폭동의 한 예이다.
참고 자료
한영우, 『다시찾은 우리역사』, 경세원, 20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8』, 국사편찬위원회, 1996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