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중세사 요나라
- 최초 등록일
- 2012.05.24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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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중세사 요나라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요(遼) 개관
2) 요(遼) 의 건국
3) 요(遼)나라의 제체 - 이중통치체제
4) 요(遼)나라의 사회 - 사민정책과 거란족의 풍습
본문내용
가)건국이전의 거란부족 : 거란(契丹)족은 요하상류의 시라. 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계통의 동호족으로 4세기 중엽부터 등장하였다. 거란 사회는 8개의 큰 가계로 나누어진 한 씨족에 의해서 통솔되었는데, 이 씨족은 부인을 다른 주요 씨족에서 정규적으로 취하였다. 농촌과 도시에서 정착 생활을 영위한 중국인 주민들이 그러하였듯이, 비 거란계 부족들도 거란 사회에 통합될 수 있었다. 중국인의 지위는 노예애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노예적 신분, 부분적 자유민과 완전한 자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거란족은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서 요서지방으로 남하하여 중국과의 마찰이 발생하였는데 북조의 여러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유지하였다. 당초에 거란 추장 굴가(窟哥)가 부족을 이끌고 당에 종속하여 당은 거란을 당의 기미부주(羈縻府州) 체제하에 기미주(羈縻州)로 삼아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였다. 이에 거란족의 부족사회는 당제국의 정치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게 되었다. 당의 이민족에 대한 가혹한 지배로 7세기 후반에 거란족이 봉기하여 반란이 발생하였다. 바란에 대한 당의 진압으로 거란족은 대릉하의 목지를 버리고 동복방으로 이주하여 황수(潢水)와 토하(土河)의 합류점에 정착하였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거란족 내부의 민족적인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부족 간에 단결력이 향상되었다. 이후 당 말기 9세기 중엽에 당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거란족은 단결력을 바탕으로 자립을 성취하게 되었는데 8세기 전반 당의 755년 안사의 난을 계기로 지방절도사의 난이 계속되자 거란족은 당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907년에 거란은 과거 흉노에 비견할 만큼의 부족 연맹체를 결성하였다. 그 해에 추장이 스스로 거란의 황제를 선언한 것은 거란족으로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곧이어 그는 왕조를 세워 아들을 법적 후계자로 삼았으나 형제들과의 싸움을 포함한 끈임 없는 전쟁에 빠져들었다. 제국이 확장됨에 따라 중국의 세습 군주제가 확고하게 채택되었다. 이를 거란족은 기병대에도 강성하게 훈련시켰다. 군주의 기마 궁사들은 ‘오르도’로 조직되었는데, 오르도는 군주천막의 신변 경호원을 이루었으며 뒤에 서양인들이 ‘호르드’라 부는는 것의 원형이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