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외교정책
- 최초 등록일
- 2011.12.27
- 최종 저작일
-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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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목차
Ⅰ. 서론
Ⅱ. 군사정부 시기 외교정책 (1961.05.16.~1963.12.17.)
1. 대미(對美)외교
2. 대일(對日)외교
Ⅲ. 제3공화국 시기 외교정책 (1963.12.17.~1972.10.17.)
1. 대미(對美)외교
2. 대일(對日)외교
3. 외교의 다변화
Ⅳ. 유신체제 시기 외교정책 (1972.10.17.~1989.10.26.)
1. 대미(對美)외교
2. 대북(對北)외교
Ⅴ. 결론
본문내용
Ⅱ. 군사정부 시기 외교정책 (1961.05.16.~1963.12.17.)
1. 대미(對美)외교
1961년 5월 16일 새벽, 쿠데타 군이 서울시내 주요 지휘시설을 점거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여 쿠데타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으나 미국정부가 쿠데타를 용인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당시 한국의 국가적 생존이 미국의 군사 및 경제지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던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쿠데타의 궁극적인 성패여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반응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되었다. 그 배경에는 쿠데타 이전의 한국의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정 하다는 미 행정부의 인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 리더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61년 11월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을 방문, 케네디와 회담함으로써 군사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승인을 사실상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군사정부의 대미 관계 정상화로 박정희 의장은 쿠데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2. 대일(對日)외교
박정희가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기 이전 첫 해외 순방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박의장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만난 후 청구권은 구체적인 법적 근거만 있는 것만을 요구할 것이며 평화선 문제는 일본이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이면 신축성 있게 다룰 용이가 있다고 공표함으로써 한일협상 타결의 기본방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평화선 문제는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 간의 메모를 통해 청구권 문제가 타결되는 것으로 그 역사적 기원과 정당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타결’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참고 자료
· 외교통상부, 『한국외교 50년』, 외교통상부, 1999
· 김용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 한국외교정치사학회, 『한국 현대 정치외교의 주요쟁점과 논의』, 선인, 2009
· 하영선,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 김창훈, 『한국 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2002
· 외교통상부, 『한국 외교 50년』, 외교통상부, 1999
· 유영옥, 『한국외교관계의 이해』, 홍익재, 2006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외교사Ⅱ』, 집문당,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