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역사와 인물
- 최초 등록일
- 2011.12.17
- 최종 저작일
- 2011.09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A+ 받은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인물로 살펴본 명나라
⑴ 영락제
⑵ 정화
⑶ 장거정
⑷ 고헌성
3. 발표를 마치며
4. 참고문헌
본문내용
2. 인물로 살펴본 명나라
⑴ 명 왕조의 제3대 황제 영락제 [永樂帝, 1360년 ~ 1424년]
영락제(永樂帝, 1360년 ~ 1424년)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1424년)이다. 묘호는 성조(成祖),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이며 이름은 주체(朱棣),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1398년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가 자신을 비롯한 숙부들, 즉 홍무제의 아들들의 군권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니, 건문제와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1402년에 북경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홍무제의 4남 연왕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계유정란)
영락제의 황후는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장녀이다. 서황후(徐皇后)가 병사하자 영락제는 그녀의 여동생 서묘금(徐妙錦)을 황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서묘금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영락제는 끊임없이 궁녀를 보내 서묘금을 설득하였으나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영락제의 명을 받은 궁녀가 서묘금의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반드시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하자, 그녀는 "내겐 여성적 매력이 없어 황후가 되기에 부족하니 폐하께 다른 훌륭한 여자를 간택하시라고 고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궁녀가 궁궐로 돌아간 후 그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 일로 영락제는 매우 낙심하여 다시는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황제에 즉위한 후에 먼저 3일간 황궁 청소를 명령하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건문제의 옛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으며 유생 방효유에게는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그의 십족(구족에다 방효유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방효유의 문집을 애독하는 모든 사람 추가)을 차례로 처형하고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방효유의 처와 자녀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하여 화를 면하였다. 신한들을 잔인하게 진압함으로써 그가 번왕(藩王: 제후)들의 병권을 해제한 것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다지는데 대단히 유리하였다. 북경천도는 1402년 영락제가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영락제의 즉위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다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새로운 수도의 중심에 거대한 궁전을 짓기로(1407)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재색의 금지된 성이 자금성(1420)이다.
참고 자료
차하순, 『서양사 총론1』, 탐구당, 2002
김성준, 『유럽의 대항해시대』, 신서원, 1999
미야자키 마사카스 지음, 이규조 옮김『정화의 남해 대원정』, 일빛, 1999
허일·김성준·최운봉 편역 『중국의 대항해자 정화의 배와 항해』, 심산, 2005
개빈 멘지스 지음, 조행복 옮김 『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사계절, 2004
중국사학회, 『중국역사박물관(9)』, 범우사, 2005
샹관핑 지음, 차효진 옮김, 『중국사 열전 황제』, 달과소, 2008
저우스펀 지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중국사 강의』,돌배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