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에 대한 나의 견해(한국 근현대사)
- 최초 등록일
- 2011.10.27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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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현대의 정치적,외교적인 전략을 들어 문제점 지적과 대안을 제시한 내용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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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한 왕권 약화에 문제점이 있음을 보고, 안으로는 내정개혁과 밖으로는 쇄국정책을 해나갔다. 안으로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경복궁을 중건하였고 삼군부를 두어 국방력을 강화했다. 또 서원을 없애고 호포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내정개혁은 세도정권의 부패와 폐단을 척결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경비를 모으기 위한 지나친 세금 징수는 양반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왕권을 강화하여 무너져 가는 봉건체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데 있었다. 밖으로는, 외국선박의 출현을 경계하고 통상을 금지했다. 구미열강과 국교를 맺은 일본과 통상을 단절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 대비하였고, 구미열강의 통상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서학을 봉건질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적과 내통하는 침략의 앞잡이라 하여 탄압하였다. 서학 탄압을 빌미로 하여 프랑스와 미국은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대원군 정권은 더욱더 쇄국정책을 강화하며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세계사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의 정책은 봉건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했다. 따라서 민란형태의 변란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지배층 안의 보수 유생들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했다. 따라서 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나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비 척족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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