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운동] 해방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 최초 등록일
- 2002.10.14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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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서론
⊙노령에서의 한인공산주의 운동
⊙초기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 본론
1.한국공산주의 운동
⊙조선노농총동맹
⊙서울청년회
⊙북풍회
⊙화요회
⊙고려공산청년회&조선공산당
2.한국공산주의의 해체
- 결론
⊙조선공산당의 해체
⊙박헌영
- 참고문헌
본문내용
2.한국공산주의의 후퇴
조선공산당은 창당한 그 해 11월 22일 신의주에서 생긴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촉수에 걸려 들어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신의주의 한 식당에서 [신만청년회] 회원29명이 술자리를 벌리고 있다가 그 아랫방에서 식사를 하던 친일파 박유정 변호사 및 조선인 순사 한 명에게 시비를 걸고 두들겨 패준 사건이 생겼다. 이 때 신만청년회 회장 김득린이 자신이 차고 있던 완장 모양의 토시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성공했다"고 하였다 한다. 이것을 수상히 여긴 왜경이 이들을 취조하여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관련된 문서를 한 회원의 집에서 찾아 내었다. 이로써 간부들은 거의 체포되고 1차 조선공산당은 붕괴된다.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약 100명 체포 83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 가운데 39명(47%)이 신문기자, 학생, 저술가, 교사 등의 지식인이었으며 나머지 가운데 16명은 실업자였으나 이들도 대체로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체포되기 전 당시 조선일보사 진주지국장이던 강달영에게 조직의 재건을 부탁한다. 강달영은 1926년 2월 김철수 등과 더불어 제2차 조선공산당을 발족한다. 강달영은 국외의 운동세력과의 연계를 추진하였다. 일본부 상해부 만주부 연해주부등을 설립 추진해 갔다.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는 조봉암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