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국의 활약
- 최초 등록일
- 2011.10.07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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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라국의 활약
목차
1.서문
2.안라국의 형성과 성장
3.안라국의 변화와 발전
4.5세기대 이후의 안라국의 활약과 권역
5.6세기대 안라국의 대외관계와 멸망
6.결론
본문내용
안라국의 형성과 성장
1)안라국 형성의 전단계
함안의 지형은 남고북저의 분지형으로 예로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엿보이는 곳이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지표채집을 통해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위치했었다는 것만 알뿐 소,대규모 유적의 발굴은 전무하며 유적의 등장시기는 청동기시대부터이다. 그리고 안라국의 고지인 함안 분지에선 청동기시대 지석묘 군집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아선, 분지라는 특성과 함께 이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부터가 안라국 형성의 첫 시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든간에, 이러한 기반위에서 변진안야국이 형성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청동기시대에서 바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2)안라국의 형성
안라국의 형성시기를 알 수 있는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는 불충분하다. 가장 이른 기록으로 생각되는 것이 삼국지의 변진조 기사이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의 기록) 고로, 문헌적인 기록에서는 안라국의 형성을 규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고학 자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고고학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거둔 성과에서는 목관묘의 등장과 그와 함께 부장된 전기와질토기의 출현을 안라국 형성의 지표로 삼아왔다. 안라국의 고지인 함안의 도항리 목관묘 유적에선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정확한 절대연대를 알순 없지만, 김해의 대성동과 창원 다호리유적 등의 편년 연구성과를 종합하고 안라국 지표채집 유물을 비교하여 추론해보아선 형성시기가 늦어도 기원후 1세기대로 볼수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함안 안라국의 성립이유에는, 인근의 김해의 구야국, 부산의 독로국과 마찬가지로 준왕의 남하~위만조선~한군현의 설치 등 북방에서의 일련의 정치적 파동에 의한 유민의 남하와 철기 등 선진문물의 전래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와질토기와 철기류등의 선진문물유입과 함께 남강 수계라는 농경에 적합한 자연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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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충, 「가야 각국사 연구」『혜안』 ,2003
이성주, 「1~3세기 가야정치체의 성장」『한국 고대사 논총5』 ,1993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