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사]【A+】세계문화사- 왕정복고
- 최초 등록일
- 2011.08.01
- 최종 저작일
- 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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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정복고.
찰스 2세, 별칭은 The merry Monarch. 1630년 5월 29일 런던에서 출생하여 1685년 2월 6일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찰스 1세의 맏아들인 그는 영국의 왕으로써 1660~ 1685년까지 25년간 보위에 있었으며,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몇 년간 망명생활을 한 후, 영국 왕으로 복귀함으로써 영국 역사에서 그의 재위기는 왕정복고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적응력과 인물에 대한 판단력은 재위시절 끊이지 않았던 성공회와 가톨릭 사이에 벌어진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이 되었다.
제임스 2세, 별칭은 Duke of York. 1633년 10월 14일 런던에서 출생하여, 1701년 9월 16일 프랑스의 생제르뗑에서 사망하였다. 영국의 마지막 가톨릭교도 왕으로써 그의 재위기간은 1685~1688년...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찰스 1세의 두 번째 아들인 제임스...그는 거의 평생 동안 보수적인 성공회 궁정 대신들의 대변인이나 다름없었다.
1. 찰스 2세의 전제정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대륙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크롬웰이 죽고 난 후 정국이 혼
미해 지자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귀국 직전, 네덜란드에서 선언을 발표해 정치범의 사면, 혁명과정에서 이루어진 토지 소유권 변동의 인정, 신앙의 자유 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660년 5월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왕정복고 : 혁명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일단 폐지되었던 왕정<왕이 다스리는 정치>로 다시 돌아가는 일)
1660년~1662년, 왕정복고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찰스의 개입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분명히 그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1640년~1641년에 찰스 1세가 양보했던 사항
(버킹엄이 죽은 뒤 왕의 측근 고문관이 된 두 사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유능한 아일랜드 총독인 스트래퍼드 백작의 자문에 따라 찰스는 1640년 4월에, 나중에 단기의회로 알려진 의회를 소집했다. 소집 목적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회는 먼저 정부에 대한 불만사항을 논의할 것을 주장하며 전쟁 재개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5월 5일 찰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고 선박세 징수는 계속 시행되었으며 전쟁도 계속되었다. 8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진격해왔을 때 찰스의 군대는 뉴번에서 속수무책으로 포격당했다. 2차례나 패한 것에 상심한 찰스는 귀족회의를 열었고 그들의 자문에 따라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장기의회는 164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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