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의 문학관과 역옹패설
- 최초 등록일
- 2011.07.11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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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제현은 고려 말 고문운동을 주도한 학자이자 문인으로, 그의 문학관과 더불어 그의 저서인 역옹패설를 중심으로 다룬 문서입니다. 더불어 그가 생각한 용사, 신의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있습니다.
목차
1. 생애와 활동
2. 이제현의 문학관
1) 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
2) 고문관(古文觀)
3. 문학론
1) 풍격론(風格論)
2) 수사론(修辭論)
(1) 본질적인 문장 표현기법
(2) 작시상의 방법
3) 신의론(新意論)과 용사론(用事論)
본문내용
1. 생애와 활동
이제현(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말 고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뚜렷한 문학관을 지니고 창작활동은 했던 문인이자, 원(元)과의 대외 교섭에서 수완을 발휘하고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외교관이며 정치인이자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학자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饑翁),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관 병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그는 “과거를 본다는 것은 작은 기예일 뿐이다. 이것으로 나의 큰 덕성을 기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라고 하여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장인으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7세 (1303년) 때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22세(1308년) 때 예문관·춘추관에 선발되었다. 28세(1314년(충숙왕 1)) 때, 처음으로 고려에 도입된 성리학을 백이정으로부터 배움으로써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같은 해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34세(1320년(충숙왕 7))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고, 37세(1323년) 되던 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나자 그는 행성설치의 불가함을 항소하였는데 원제는 그의 완곡하고 논리적인 서장(書狀)으로 인하여 행성설치를 철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글은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39세(1325년)에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동안 『역옹패설(饑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58세(1344년) 때 8세로 등극한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