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최후의 날 일본은 왜 지원군을 보냈는가?
- 최초 등록일
- 2011.06.24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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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스페셜 `백제 최후의 날 일본은 왜 지원군을 보냈는가`를 보고 쓴 레포트 입니다.
줄거리와 짧은 감상평이 담겨 있습니다.
레포트 쓰시는데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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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능가산엔 우금산성이란 성이 있는데 당시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백제부흥군들이 3년동안이나 부흥운동을 하던 곳이다. 당시 부흥운동을 이끈 장군은 백제의 장군 복신과 승려 도침으로 이들은 수많은 유민들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복신은 왜에 사신을 보내 당시 왜에 거주하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복신의 요청에 따라 백제로 돌아온 부여풍은 곧이어 왕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3년간의 부흥운동이 위기를 맞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흥군을 이끌던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을 기습공격한다. 이때 왜의 지원군이 바다 건너 백강에 도착하는데 2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지원군이었다. 그리고 백강에선 왜군과 백제군 그리고 나당연합군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출병한지 보름만에 왜군은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때 부흥군의 수장이었던 부여풍의 최후도 비참했다. 기록에 의하면 싸움에서 패한 부여풍이 결국은 고구려로 망명 했음을 알수 있다. 구심점을 잃은 백제는 이후 힘없이 무너졌다.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도 전쟁에서 패한지 불과 열흘뒤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663년 일어난 일명 ‘백강구전쟁’은 동아시아 4개국이 참전한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백제 최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백강구전쟁을 놓고 ‘백강구전쟁은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백제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부흥군들만이 나라를 되살리기위해 신라와 맞서고 있었는데 속국이 아니라면 멸망한 나라에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낼 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건 이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이란 인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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