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중학생)
- 최초 등록일
- 2011.06.23
- 최종 저작일
- 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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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중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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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연개소문
먼저 연개소문에 주변인물에 대하여 알아보자.
연개소문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幕離支)의 지위에 올랐었다. 개소문이 막리지의 직위를 계승하려 할 때 뭇 사람들은 그의 성품이 포악하다 하여 그의 계승을 거부하였으나, 그는 뭇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위의 계승을 간청하였을 뿐 아니라, 만약에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할 시에는 죽여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연개소문이 국권을 한 손에 쥐고 그 위세를 내외를 떨친 642년에서 666년 사이의 시대는 서쪽으로는 당태종 이세민이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남으로는 신라가 김춘추, 김유신등의 활동으로 나당 양국의 관계가 점차 접근하여 갔을 뿐 아니라 고구려 내부적으로는 2,3차에 걸쳐 대규모적인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복잡한 정세를 띄고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에 영걸 연개소문이 나타난 것이다.
연개소문은 수나라가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당한 패배의 고배에 대하여 당나라가 언젠가는 복수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국방에 한시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동북으로는 부여성에서 남으로는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1천여리를 잇는 장성을 쌓았다.
고구려 내부에서는 이러한 연개소문의 영웅적인 성격과 위맹 무쌍한 수완을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그들은 왕과 은밀히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그 밀의가 누설되어 내막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휘하의병사를 모아 성 남쪽에 소취(召聚)하여 주찬을 열고는 여러 대신들과 요인들을초청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오자 연개소문은 도열한 병사들로 하여금 모두 죽이게 하여 무려 180여명을 없애 버리고, 이러 대궐로 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는 일대정변을 일으켰다.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한 그는 왕의 조카인 보장을 신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고구려가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의 대당통로인 당항성을 빼앗자 당나라는 보장왕 3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신라가 화해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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