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답사보고서2
- 최초 등록일
- 2011.06.17
- 최종 저작일
-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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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충렬사를 다녀와서-. 두 번째로 쓴 답사보고서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충주의 위인이라고 하면 말하는 위인 중 한 분은 임경업이라는 분이시다.
이번에 답사를 다녀온 사적 제 189호인 충렬사는 조선시대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영조 2년(1726)에 창건되었다.
창건 이듬해인 영조 3년에는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영조대왕이 충렬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정조 15년(1791)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을 하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따가 나올 `어제달천 충렬사비`이다.
충렬사를 들어가기 전에 전체 약도가 그려져 있는 ‘충렬사 안내도’를 보았다. 한 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일 뿐인데 한 눈에도 꽤 넓어보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사람들을 이긴 유일한 장군이 임경업 장군이었으나, 끝내 인조께서는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굴복하고 볼모로 임장군을 바치게 되었고, 그렇게 청나라에서억울하게 돌아가신 임장군에게는 충성을 바치고 애석하게 돌아가신 분이라 하여 충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다.
들어가자마자 본 첫 번째 건물의 이름은 유물전시관이었다. 안에는 임장군과 그의 부인에게 내려졌던 교지와 첩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영조께서 하사하신 현판과 정조께서 하사하신 족자가 모셔져 있었다. 필체가 굉장히 서툰 아이 같은 글씨체를 가진 것이 영조왕이라면, 정조왕께서는 조선 왕조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필체를 가졌다고 한다.
안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찾아보다가 한가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임장군이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했었다는 추련검과 검의 칼배에 새겨져 있는 검명시라는 것이다.
추련검은 역사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가치가 큰 유물이라고 한다.
이 검의 칼날은 철이고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이고,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또한 검명시는 칼배의 양면에 새겨져 있는데 이 시를 전부 이해하진 못해도 임장군이 얼마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時呼時來否再來/
때가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
一生一死都在筵/
한번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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