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송 유의양론
- 최초 등록일
- 2011.05.02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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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후송 유의양에 관한 연구 및 남해문견록과 북관노정록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의 리포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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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의양
2. 삶과 사귐과 사람됨
1) 집안
유의양의 집안을 보면 8대조는 병조참판, 7대조는 전라관찰사, 6대조는 군수, 증조는 禁府都事, 조부는 經筵修撰을 지냈고, 아버지는 太學掌議로 송시열의 문묘 배향을 상소하였던 후였으며, 어머니는 藍司를 지낸 重熙의 딸인 청주 한씨였다.
유의양은 2남 2녀의 4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아들 영과 청송인 심상조의 아내가 된 딸을 두었고, 재혼한 둘째부인 창원 유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화를 낳았다. 큰아들 영은 형 경양의 뒤를 잇도록 出系시키고, 둘째아들은 자를 화지, 호는 지산이라고 하였다.
2) 삶
유의양의 자는 子章 또는 季方이라 하고, 호는 後松 또는 秋人이라고도 하였다. 영조 22년에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은 도암 이재에게서 경학을 공부하고, 영조 32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영조 39년에 병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영전되기에 이르렀다. 영조 41년에는 사간원 정언, 영조 45년에는 世子侍講院司書, 이듬해에는 다시 정언이 되고 이듬해에는 홍문관수찬, 부수찬에서 삭탈관직을 당하고 서인이 되어 남해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6개월을 머물고 돌아와서 『남해문견록』을 국문으로 지었다. 이듬해에 사헌부지평·헌납·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가 아산으로 또 유배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가 되었으나, 세 번째 유배의 길을 함경도 종성으로 갔다가 돌아와 『北關路程錄』4권 4책을 국문으로 지었다. 이후 정조 5년에 예조참의가 되어 『춘관지』와『영희전지』를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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