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영유권논쟁
- 최초 등록일
- 2011.05.02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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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45년 한국의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1952년 1월 18일에 포고된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한국 정부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하였고,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문제가 일어났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 독도 영유권논쟁 배경 출처 : 네이버 백과
1945년 한국의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1952년 1월 18일에 포고된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한국 정부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하였고,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문제가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성종실록(成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의 문헌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于山島) 또는 삼봉도(三峯島)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되어 있었다. 특히, 17세기에 한·일 간에 울릉도 영유권문제가 야기되었을 때는 민간외교가 안용복(安龍福)의 외교활동으로 1696년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하게 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의 기록을 보면 이 섬 주변에 가제(강치)가 서식하는 데서 1794년경부터 가지도(可支島)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그후 조선 조정이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치면서 울릉도 및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부터 조선 조정은 종래의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지양하고 개척령(開拓令)을 발포하여 강원·경상·전라·충청 도민을 이주시켜 다시 개발을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독도도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이 때부터 독도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명칭은 1906년 울릉군 군수 심흥택(沈興澤)이 그 보고서 중에 기록함으로써 최초로 문헌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해주고 있고, 또 포츠담선언에 입각한 연합군의 지령(指令)도 독도를 일본의 속도(屬島)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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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