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국어학] 석보상적절서
- 최초 등록일
- 2002.07.22
- 최종 저작일
-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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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석보상절서 조별 발표자료인데요. 그때 잘했다고 칭찬 받았어요
참고가 되실거예요.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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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월인석보}는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하여 1459년(세조5)에 간행한 책이다. 합편 방식은 {용비어천가}에 따라서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한 것이다. 1446년(세종28) 병인 3월 돌아간 소헌왕후의 추천을 위하여 세종이 당시 수양대군이던 세조에게 석가의 일대기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세조가 중국에서 편찬된 승우의 {석가보}와 도선의 {석씨보}를 얻어 보았으나 내용이 같지 않으므로 두 책을 합쳐서 한문본인 {석보상절}을 편찬한 다음에,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 쉽게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석보상절}을 만들어 진상한다. 진상된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을 이내 짓게 된다. 관판본은 대체로 서발의 연대가 출판의 연대와 합치하므로 {석보상절}의 서문에 '정통십이년'이라는 연기를 통해 이것이 1447년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경우에는 서발이 없어 분명하게는 알 수 없지만 {월인석보} 서문의 표현 그대로 {석보상절}을 본 세종의 '첩제'이므로 같은 연대의 간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1년 남짓한 기간에 편찬한 책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편찬이 완성된 {석보상절}을 보고 곧장 지은 노래이므로 이 두 책은 모두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즉, 이 두 책은 수정·보완될 운명을 지닌 채 간행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월인석보}가 간행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간행된 직접적인 동기는 1457년 9월에 일어난 의경세자의 죽음이다. 이 때문에 세조는 {월인석보}의 편찬에 침식을 잊고 정성을 다해 2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이를 완성하였다. {월인석보}는 1434년에 주조된 갑인자의 한자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훈민정음} 해례본,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의 전서체 한글 활자를 지양하고 한자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한글 활자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석가보}를 바탕으로 한 석가의 일대기이지만 사이사이에 {법화경}, {아미타경}, {지장경} 등 많은 불경들이 삽입된 책이다. {금강경삼가해}와 {남명천계송언해}에 같이 나타나는 1482년(성종13)의 한계희와 강희맹이 지은 발문에 따르면 세종은 {금강경삼가해}와 {남명천계송}도 번역하여 {석보상절}에 삽입되기를 바랐을 뿐 아니라 친히 그 일부를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석보상절} 내지 {월인석보}의 편찬은 주요한 불경을 망라할 계획이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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