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호적제도
- 최초 등록일
- 2011.03.14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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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지방사
목차
Ⅰ. 서론
Ⅱ. 호적제도의 역사
Ⅲ. 호적제도의 개편
Ⅳ. 조선시대 호구 파악과 호적의 용도
Ⅴ.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중세 봉건국가는 백성들을 몇 개의 신분층으로 나누어 통제하였다. 이에 따라 호적을 작성하는 방법이라든가 호패의 재질, 모양, 크기도 각각 달랐다. 이는 신분에 따른 사회통제 방식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호적은 일반 민중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법적 장치였다. 형사, 민사사건 등은 호구가 제시되지 않으면 접수 되지 않았고 과거시험 때도 호적에 올라 있지 않으면 응시할 수 없었다.
이 글을 통하여 국가가 백성들을 통제하는 장치였던 호적제도를 어떻게 활용하고 개편해 나갔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Ⅱ. 호적제도의 역사
국가에서 백성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호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도입되어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장적’ 이라는 신라촌락문서이다.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래 국가권력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토지와 사람 수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진 촌락문서는 국가에서 촌락마다 호를 단위로 하여 토지와 인구 및 가축 수, 유실수 등의 대한 정확한 파악을 통하여 호등(戶等)을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려시기에도 족보에 수록된 호적 자료를 통하여 그 시기에도 국가의 백성 파악과 직역의 구별이 엄격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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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교재: <조선시대 생활사>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1996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한국호적제도사연구> 최홍기, 서울대학교출판부,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