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광종 성종의 지배체제정비
- 최초 등록일
- 2011.03.02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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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지배체제 정비 태조 광종 성종에 대해 알아 본다.
목차
目 次
서론
본론
Ⅰ.왕건의 건국
Ⅱ.태조의 호족 연합적 정책
Ⅲ.광종의 왕권 강화책
Ⅳ. 유교적인 중앙집권 체제의 완비
1. 불교 폐단 시정과 유교적 문물의 정비
2. 중앙 집권체제의 완성
1) 鄕戶勢力의 통제
(1) 중앙의 관제 정비
(2) 郡縣制의 정비
(3) 科擧制 ․ 敎育制
2) 鄕戶勢力의 회유책
(1) 淳化別號
(2) 事審官의 정원 조정
Ⅴ. 崔承老의 時務 28條
1. 五朝政績評
2. 時務 28條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고려왕조의 건국은 종래 신라의 중앙 진골귀족에 대신하여 지방을 거점으로 새로운 정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대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왕조를 건국한 왕건도 그의 재위 중에 호족 문제에 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고려 국초에 있어서 호족세력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던가를 잘 말해 준다 하겠다.
본고에서는 왕권과 호족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태조의 호족연합적 정책과 광종의 왕권강화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성종대에 본격화되는 정치제도와 정치세력의 개편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왕건의 건국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송악(개성)지방 호족의 자제였다. 왕건 집안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약간씩 견해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나, 그의 가문이 상당한 기간 동안 호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왔다는 이해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왕건이 일거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높은 덕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송악의 대 호족으로서 근기지방(近畿地方) 및 패서(浿西)지역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등 그때까지 쌓아 온 세력기반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일단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 왕건은 서울을 철원으로부터 자기의 본거지인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군사적 지반을 확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 5대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신라에는 우호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에 대하여는 무력으로 대결해 나가는 정책을 썼다. 이와 같은 태조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고려는 먼저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평화리에 신라를 병합하는 데 성공하였다(경순왕 9년, 태조 18년, 935). 이어서 이듬해에는 왕실이 내분을 일으켜 분열된 후백제를 일리천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시의 왕인 신검(神劍)의 항복마저 받아내 마침내는 후삼국도 통일을 보게 되었다(태조 19년, 936).
참고 자료
고석규 외, 「역사 속의 역사 읽기 1」, 풀빛, 1996.
박용운 외, 「한국사 12,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