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골품제’와 ‘전쟁’은 원효가 살던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나고 불교 이념이 민중들 가슴에 자리 잡는 데에 원인적 측면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골품제와 전쟁의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원효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아가 시대상황이 불교 대중화 운동과 어떠한 연관을 갖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1. 원효가 살았던 시대 상황
2. 불교 대중화 운동의 배경
3. 원효의 불교 대중화 과정(사상 및 행적 실천)과 그 영향
4. 원효의 불교 대중화 운동이 주는 교훈
본문내용
1. 원효가 살았던 시대 상황
‘골품제’와 ‘전쟁’은 원효가 살던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나고 불교 이념이 민중들 가슴에 자리 잡는 데에 원인적 측면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골품제와 전쟁의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원효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고, 나아가 시대상황이 불교 대중화 운동과 어떠한 연관을 갖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진골 중심의 지배체제-골품제
골품제는 법흥왕(514~540) 때 형성된 이래로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 사회를 지배해 온 신분제로서 신라 사회를 지탱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골품제는 원효가 살았던 당시 신라 사회를 알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요소이다.
골품제는 최고 신분인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와 일반 귀족 및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를 결합시킨 것으로 신분을 총 8계층으로 등급화 하였다. 골제는 성골과 진골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성골 출신이 왕위를 독점해 오던 관행이 삼국 통일 무렵 사라지고 이후에는 진골 출신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두품제는 여섯 개의 두품으로 구성되었고, 위로 6두품부터 아래로 4두품까지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귀족계층이었으며 나머지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평민계층에 해당되었다.
골품제의 운영 측면을 살펴보면 원효가 살았던 당시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신라 사회에는 총 17개의 관등이 있었고 앞서 말했듯 4두품이상의 계층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신분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상한선이 결정되었다는 점이 특이한데 진골의 경우는 가장 높은 관직인 이벌찬까지, 6두품은 6위 아찬, 5두품은 10위 대나마, 4두품은 12위 대사가 각각 상한선이었다. 달리 말해, 골품제에 의해 진골은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한 반면, 진골 아래의 계층들은 신분에 따라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지배층(3두품~1두품)은 물론 진골을 제외한 일반 귀족층(6두품~4두품)까지도 지배 구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가 사람을 쓰는데 골품을 따지니 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다한들, 그 장벽을 넘을 수 없다.”는 말로 골품제를 비판하고 당나라로 건너갔다는 설계두 신라의 6두품 귀족이었지만 골품제의 모순을 실감하고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 원정 때 전사하였다. 군공을 세워 후에 대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참고 자료
남동신, 「원효의 대중교화와 사상체계(元曉의 大衆敎化와 思想體系)」, 서울 : 서울대학교 대학원, 1995.
고영섭, 「원효의 통일학」, 예문동양사상연구원․고영섭 편, 「한국의 사상가 10人 원효」, 서울 : 예문서원, 2002, pp.164-225.
남동신, 「(영원한 새벽)원효 :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 서울 : 새누리, 1999.
김형효(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ㆍ종교연구실), 「元曉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신오현, 「원효 철학 에세이」, 서울 : 민음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