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 최초 등록일
- 2010.12.15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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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학 개론 시간에 작성한 한국의 교육사상가 한서 남궁억 선생에 관한 내용.
선생의 생애, 학문적, 정치적, 문화적 활동의 내용을 담고 있음.
학점 보장.
목차
Ⅰ. 한서 남궁억선생의 생애
Ⅱ. 한서 남궁억선생의 정치적 활동
ⅰ)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ⅱ)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
Ⅲ. 한서 남궁억의 학문적 활동
Ⅳ. 한서 남궁억의 교육적 활동
Ⅴ. 한서 남궁억의 학문과 사상
본문내용
◀교육학 개론▶
한국의 교육사상가
-한서(翰西) 남궁억
Ⅰ. 한서 남궁억선생의 생애
남궁억(南宮檍 : 1863∼1939),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를 지키고 가꾼 애국지사로 유명한 분이시다. 선생은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1939년 77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었다.
그는 1884년 아무도 영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던 시절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는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나 남궁억은 청렴결백하여 사람들이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희다고 말했다. 그는 갑오개혁 내각에서 토목국장으로 재직할 때 좁고 꾸불꾸불한 서울 종로거리와 정동거리를 똑바로 뚫고 시내에 탑동공원을 조성하였다.
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이었으나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이어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남궁억으로서는 일종의 외도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 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남궁억은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으나 그의 불같은 항일정신은 더욱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지고 남궁억이 대한 협회장을 맡는 등 운동의 핵심에 서게 되었으나 아무도 망국의 운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일제는 토지약탈을 자행하여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동토나 다름없는 간도 땅으로 쫓겨 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섰다. 여성교육이란 당시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남궁억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벌써 50대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정든 서울을 떠나 낯선 고향 강원도 홍천으로 가야만 했다. 이 낙향의 길에는 남궁억의 생애 최후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