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 최초 등록일
- 2010.11.29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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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
목차
1. 가야의 명칭
2. 가야의 영역
3. 가야의 시작
4. 가야의 멸망
5. 가야의 실체
6. 가야연구-역구사적 의미
7. 가야사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가야는 삼국과 함께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었고, 한국 고대사회의 중심부에서 삼국과 나란히 호흡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사에 대한 이해 없이 한국 고대사를 말할 수 없다. 가야를 제외한 삼국만이 정립했던 시기는 가야 멸망이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00년도 되지 않았다.
가야사는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거의 잊혀진 나라였다. 이는 문헌 사료상에 가야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고려시대에 조차 이를 제외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되고, 가야의 전, 후기 맹주국이 자리 잡았던 김해나 고령에 가 보아도 백제나 신라의 수도였던 부여나 경주에 비해 이렇다 할 문화유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3세기 이후로 가야 연맹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대외적으로 엄연히 하나의 정치체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고대 국가의 면모를 보여 중국 남제(南齊)로부터 책봉받기도 하였다.
가야제국은 거의 6세기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나란히 세력을 하며 독립된 왕권과 영역을 유지하였다. 고대사를 삼국만의 역사로 인식할 때 가야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부여 등의 역사는 무시되며, 우리 고대사를 되살리는데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 고대사의 범주, 성격 등도 새롭게 정의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차지하는 의미도 새롭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1. 가야의 명칭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처럼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나라의 이름을 두고 가야만큼 다양하게 불려진 나라도 없다. 한자표기도 그렇고 옛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도 다양하다. 가야 각국의 이름,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나눌 수 있다. ‘가야’, ‘가라’, ‘가락’, ‘구야’, ‘가량’, ‘하라’ 등 10여 종이 있었다.
그 중 금석문이나 역사서를 통해서 볼 때,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은 가야와 가라였다. 가야는 加耶, 伽耶, 伽倻, 로, 가라는 加羅로 표기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