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10.11.0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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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붕당정치의성립
목차
1. 대북정권의 몰락
2. 인조반정 이후의 공존체제
3. 공신계와 비공신계의 갈등
4. 붕당정치의 의의
본문내용
1. 대북정권의 몰락
광해군대(1608~1623)의 정치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치를 주도한 북인은 특색있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북인의 독점적인 정국 주도와 그로 인한 인조반정으로 인해 뒷 시기로 순조롭게 이어지는 데 큰 장애를 겪게 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전반적으로 북인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가운데, 유영경 등이 선조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원하고 있었던 데 반해 정인홍 중심의 대북이 세자인 광해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북 중심의 북인이 단순히 광해군을 지원했다는 것만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향촌 기반,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쌓아 놓은 공로와 주전론자로서의 명분, 그리고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은 강한 학연 등이 그들 세력의 기반이 되고 있었다.
이후 대북은 더욱 강력하게 인사권을 장악하고 중앙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김진재가 황적 등과 함께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태경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것을 다스렸다는 광해군 4년의 김직재의 옥사를 통해, 외척 유희분을 중심으로 삼사에 진출하여 조정의 논의를 이끌던 소북에 대해서까지 공세를 강화하였다. 또 박응서 등 명가의 서얼들이 은상을 살해한 사건이 심문과정에서 그들이 선조비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체남을 영입하고 영청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화하였고, 거기에 이정구·김상곡·정사호·서성·한준겸·박동량 등의 서인 인물들이 연관되었다는 진술이 나오자 오역의 논리로써 서인들을 공박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