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삼국유사의 사학적 의의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
목차
1. 序 論2. 本 論
1) 史書로서의 三國遺事
2) 歷史的 位置
3) 現代的 意義
3. 結 論
본문내용
1. 序 論한국사학사에서 고대에 관한 역사나 역사서를 논할 때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유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고대를 짐작할만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이 두 사서에 의지하는 측면도 없지는 않다. 허나 바꿔 생각하면 사료가 부족하다하여 남아있는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나 현대에 있어서도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특히 사학서(史學書)의 경우에는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는 크게 다르다. 가령 저술 당시에는 중요시 되던 측면이 현대에는 도리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반대로 별로 대수롭게 서술한 측면이 현대에 와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저술당시와 마찬가지로 저술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사학서를 바라볼 때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를 모두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이러한 점을 분명히 가려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방식은 역사학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서도 이를 분별하는 데 유념하여 삼국유사가 내재하고 있는 역사적인 위치와 현대적인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서로서의 성격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2. 本 論
1) 史書로서의 三國遺事
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비교해보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이 두 사서는 150년가량의 간격을 두고 저술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사기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김부식(金富軾) 이하 10여명의 편수관들에 의한 정사(正史)였던데 반하여, 삼국유사는 일연(一然)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점은 이 두 사서의 체제의 성격을 매우 다르게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인 체제인 기전체(紀傳體)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기전체와 비슷하나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의 체제는 저자 개인의 관심사를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史書類)인 것이며, 이것이 우선 삼국유사가 지니는 첫 번째 특징이다.
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記史)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등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 관계 사료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史料)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이점에서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을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加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나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고 있다. 가령 기이편의 첫 조목인 고조선조(古朝鮮條)를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위서(魏書), 고기(古記), 구당서(舊唐書) 배구전(裵矩傳)의 세 인용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ⅰ)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서 도를 아사달 에 세우고 (經에 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無岳이라 하였다,) .......
ⅱ)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 옛적에 환인(帝釋의 이름이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 이........
ⅲ) 당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海州) 인데.......”
즉 고조선조를 구성하는 ⅰ), ⅱ), ⅲ), 의 세 부분의 인용문에서 일연은 자신의 의견을 협주(挾註)로 기입하여 인용문과의 양자 혼동의 가능성을 없앤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대게 관철 되고 있으나 때로 일연 자신의 의견을 본문 속에서 말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는 협주로써 만족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이런 때에도 일연은 그것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두곤 했다. 그 하나의 예를 卷3 흥법편(興法篇)의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 4 에 이르기를 “ 제19 눌지왕(訥祗王)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 (墨胡子)가 고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는데 군인 모례(毛禮)가 집안에 굴실(堀室) 을 만들고 안치(安置) 하였다 .....”
ⅱ) 아도본비를 살피건데, 이를기를 “아도는 고려인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인 데...........”
ⅲ) 이에 의하건대 본기(本紀)와 본비(本碑)의 이설(二說)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 와 같다.
ⅳ) 일찍기 이를 시론(試論)하건대 양(梁)·당(唐)의 이승전(二僧傳) 및 삼본국사(三本國史)가 모두 고구려 · 백제 2 국의 불교의 시작을 실었는데...“
ⅴ) 또 원위(元魏)의 석담시(釋曇始)(專始라고도 한다.)전을 살피건대, 이르기를 “시는 관중 인인데 출가한 이후 많은 이적이 있었다....”
ⅵ) 논의하여 말하건대 담시는 대원(大元)말에 해동에 와서 의회 초에 관중으로 돌아갔은즉 여기에 머물기 10여년이었으니 어찌 동사에 기록이 없겠는가....“
참고 자료
◆ 참고문헌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이기백
『삼국유사(교감역주)』 , 하정룡 시공사 2003
『삼국유사의 종합적이해 上』, 일연, 이범교 역해 민족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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