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의 시세계
- 최초 등록일
- 2010.11.06
- 최종 저작일
- 2010.11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조지훈의 작품경향에 관한 보고서
목차
1. 조지훈의 생애와 활동
2. 조지훈의 시세계의 변모 과정과 작품 경향
2-1. 시세계의 변모 과정
2-2. 작품 경향
3. 조지훈의 시론 :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 그리고 지조론
3-1.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
3-2. 지조론
4. 조지훈 작품
5. 조지훈의 문학사적 업적
6.청록집
7.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조지훈의 생애와 활동
조지훈(趙芝薰)은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조헌영(趙憲泳)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한양 조씨 일색의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조부 조인석은 한학에 조예가 깊고 신문명과 일본 문화를 끝까지 받아들기를 거부한 반일 지사였다. 부 조헌영은 제헌 2대의 국회의원으로서 영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새롭게 공부를 해 동양 의학의 권위가 된 걸출한 인물이었다.
조지훈은 보통학교를 3년(1925년∼1928년)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조부로부터 한학을 습득하며 성장하였다. 이처럼 선비 지사인 조부 밑에서 한학을 연마하게 된 것이 그의 인격 형성이나 학문의 향방에 큰 영향을 주었고 또한 그의 시에 도양적 시풍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1929년 처음 동요를 짓고,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배리의 <피터팬>,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등을 읽었으며, 1931년 형 동진(필명 世林)과 함께 ‘꽃탑회’를 조직하여 마을 소년 중심의 문집 <꽃탑>을 꾸몄다. 조지훈이 시인이 된 데는 세 살 위인 형 동진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이미 여덟 살에 시를 지은 동진은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고, 지훈은 늘 형을 따라 다녔다는 것이다. “지훈만한 시인이 두 사람 나올 뻔한 기라.” 라며 동향의 오일도(吳一島) 시인은 말했다고 한다.
1936년 조부의 곁을 떠나 상경하여 선배 시인 오일도의 詩苑社에 머물면서 시를 습작하는 한편 보들레르·와일드·도스토예프스키·플로베르 등을 읽고 <살로메>를 번역하는 등 서구 문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1937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 한용운이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하여 어릴 나이에 지사로서의 뜻을 확립하였다.
1939년 《문장(文章)》 3호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고, 동인지 《백지(白紙》를 발간하여 그1집에 <계산표(計算表)>, <귀곡지(鬼哭誌)> 등을 발표하였다.
1940년 <봉황수(鳳凰愁)>를 추천받았으며, 김위남(金渭男)과 결혼하였다.
참고 자료
가. <한국현대시를 찾아서> (김흥규, 푸른나무, 1999)
나.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 우리교육, 1998)
다. <청록집> (박목월·조지훈·박두진, 을유문화사, 1946)
라. 서익환, 조지훈론 :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 한양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