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조선의 시대의 역사적 현실
- 최초 등록일
- 2010.11.04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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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700년대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배경
목차
[조선후기의 정치]
[조선후기의 사상]
[조선후기의 건축]
[조선후기의 경제]
1. 여러 생산활동의 발전
2.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본문내용
[조선후기의 정치]
탕평책은 조선후기 영조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의 정책이다. 조선시대 숙종이 탕평책을 처음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환국이 자주 발생하였다. 신임옥사의 와중에서 왕위에 올라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은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는 교서를 내려 탕평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1730년(영조 6년) 그의 옹립에 공이 컸던 노론의 강경파 영수 민진원과 소론의 거두 이광좌를 불러 양파의 화목을 권하는 한편 그의 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호조참의 이병태, 설서 유최기 등을 파면하였다. 또한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 소론의 조문명을 우의정에 임명함으로써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관련된 상소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1742년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우는 등 당쟁의 해소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영조의 탕평책에 의한 화해기운 조성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당파의 대립은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사도세자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가 생기게 되었다. 사도세자를 두둔하여 시파라 불린 남인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이를 취소하는 바람에 십년 동안 과거의 응시를 거부하였으며, 이인좌 등 과격파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하여 그의 거실을 ‘탕탕평평실’이라 하고 노론, 소론뿐만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서얼도 글 잘하는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남인 출신을 영의정에 앉히는 등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써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후기의 사상]
17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파 간의 과열된 경쟁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탕평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성리학의 이념논쟁에서 패한 퇴계학파는 퇴계를 다리로 하여 주자를 직접 이해하려는 성호우파인 순암 안정복(1712~1791) 계열과 성리학을 버리고 당시에 전래되고 있었던 서학 중 천주교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성리학과 대결하려는 성호좌파인 광암 이벽(1754~1786) 계열로 나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