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와 고구려의 무장군단
- 최초 등록일
- 2010.10.09
- 최종 저작일
- 2010.10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광개토왕비와 고구려의 무장군단
목차
1.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고구려인의 진심
(1)천오백 년간 잊혀졌던 광개토왕비
(2)일본인들을 기쁘게 했던 비문의 한 구절
(3)비문은 정말 변조되었나
(4)신묘년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2. 고구려의 무장군단은 어느 정도 강했나
(1)철갑기병 중심의 고구려 무장군단
(2)중국의 군대에 결코 뒤지지 않은 고구려 무장군단
(3)광개토왕의 대제국 건설은 고구려 무장군단 덕분
본문내용
1.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고구려인의 진심
(1) 천오백 년간 잊혀졌던 광개토왕비
현재 우리 역사에서 최대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고구려 광개토왕이 으뜸이다. 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가 말해주듯이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왕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유명해졌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광개토왕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는 왕이 사망한지 2년째인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이 비는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져갔고 옛 고구려 땅에는 북방민족의 흥망성쇠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광개토왕비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말인 1880년 무렵 장백산맥 일대에 대한 봉금이 해제되어 사람의 출입이 허용되면서 현지인에 의해 발견된 직후이다.
광개토왕비는 높이 6.3m, 무게만도 39t에 달하는 장방형의 거석 4면에 모두 1775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의 세계, 중간 부분이 광개토왕의 군사적 업적,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왕릉의 묘지기에 관한 기록인 수묘인에 관한 규정이다. 그 중 광개토왕이 생전에 사방의 정토에서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간 부분은 한일 고대사학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2) 일본인들을 기쁘게 했던 비문의 한 구절
광개토왕비에 대한 연구는 일본참모본부의 요원으로서 중국에 파견된 사카와 가게야키에 의해 동비의 묵본이 일본으로 전해진 1884년부터 시작된다. 이 묵본은 곧 참모본부의 편찬과로 옮겨져 해독 작업이 진행되었고, 1889년에 『회여록』이란 잡지에 영인축소본과 해설 등이 실리면서 비로소 일반에 공개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비문에 의하면 신묘년(391년)을 시작으로 399년, 400년, 404년에 왜가 한반도에 출몰하여 고구려, 신라 등과 격전을 벌였다는 전쟁 기록이 명기되어 있다. 특히 신묘년 기사에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백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