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모함을 통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서얼 유자광에 대한 인물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10.08.21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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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재까지 악평만 줄곧 받아왔던 조선시대의 유자광에 대한 객관적이고 주위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재조명한 글입니다. 고려대학교 역사 시험대체 리포트 였습니다.
목차
1. 서론
2. 유자광의 생애 - 서얼의 관념탈피
3. 유자광의 생애 - 전성기와 최후
4. 유자광 그는 정말 악했는가
본문내용
Ⅰ. 서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읽었던 홍길동전을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이 속언은 당시 사회를 깊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길동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신분제와 같은 불합리한 문제를 앉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얼은 무엇일까? 조선사회는 축첩제가 유행했기 때문에 본부인과 여러명의 첩을 들일 수가 있었다. 양반과 양반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적자라면, 양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서자, 노비와 같은 천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얼자라 한다. 여기의 서자와 얼자를 통틀어 서얼이라 부른다. 만약 양반과 첩사이에 3명의 자식을 낳고, 그 3명의 자식들이 다시 본부인과 2명의 첩을 들여 자식을 2명씩 갖는다면 서얼손은 모두 18명(6✕3)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서얼의 수는 수학에서 배웠던 2의 n제곱꼴과 같은 수로 늘어나게 된다. 영조와 정조시대에는 서얼이 전체인구의 반을 넘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현재 잘 알려진 故(고)정주영 회장이 양반이라면 아들인 한나라당 대표 정몽준은 조선시대의 서얼이고 지금같이 정치로 진출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서얼은 당시 여러 가지 사회적인 편견과 함께 많은 제약이 주어졌다. 최서와 같이 장원에 급제해도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양사언처럼 신분을 위조해서까지 정계에 진출하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가로막았을까? 조선 시대의 사상은 성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성리학은 외교, 사회, 사상정책, 경제 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사회 분야는 양반 중심의 지배질서를 확고하게 하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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