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청교도 혁명
- 최초 등록일
- 2010.08.21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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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영국의 청교도 혁명
◈ 17세기의 영국
◈ 내란의 배경
◈ 크롬엘의 등장
본문내용
◈ 영국의 청교도 혁명
영국은 유럽대륙에 일어났던 30년 전쟁에 별로 중대한 역할을 하지 않고, 웨스트팔리아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은 서유럽 유일의 국가였다.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이루어지던 1640년대에 있어서 영국은 사실상 내란(內亂)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내전은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를 폐허로 만든 종교전쟁의 온건한 변형이었다. 이러한 내전은 대륙에서의 종교적 분쟁, 싸움이 아닌 청교도(淸敎徒)(Puritan)라는 극단적인 칼빈 주의적(主義的) 프로테스탄트와 영국의 기성교회에 집착한 온건파 프로테스탄트인 영국국교(英國國敎)와의 싸움이었다. 대륙에서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대립은 정치 헌정적인 여러 문제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었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황제의 중앙집권에 대항하여 국가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네델란드의 칼비니스트들이 스페인국왕에 항거하여 지반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군주제에 대항하여 어는 정도 봉건적인 반항을 하였듯이 청교도들은 강화되는 영국왕권(英國王權)에 맞서 의회(議會)의 권리분화를 주장하였다.
영국의 내란은 비교적 온건하였기 때문에 영국 자체는 종교전쟁(宗敎戰爭)의 전율을 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전체가 마찬가지는 아니었다. 1603년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국가들이면서도 1명의 국왕이 다스렸고 아일랜드 왕국은 전과 같이 영국 국왕의 속국이었다. 영국과 장노교적(長老敎的) 스코틀랜드 사이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있었다. 가장 사이가 나쁜 것은 잉글랜드와 카톨릭의 아일랜드 사이였다. 그것은 대륙에서의 종교전쟁의 만행과 같은 모습이었다.
◈ 17세기의 영국
17세기는 영국인들이 큰 업적을 이룩한 시대였다. 그들은 이 때 근대유럽을 움직이는 주인공의 하나로서 등장한 것이다. 1600년에는 잉글랜드와 저지(低地) 스코트랜드에서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 4.5 백만 명이었다. 그 숫자는 150년 동안 별로 많이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인구 지역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인 불만에 경제적인 압력이 겹쳐 많은 사람들이 이민(移民)을 떠났다. 1630년과 1640년 간에 2만 명의 청교도들이 뉴 잉글랜드지방에 정착하였으며, 그동안 그 만큼의 숫자가 바르바도스를 비롯한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로 이민하였다. 세번째 이민의 물결도 비슷한 규모로서 주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로 구성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북부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켈트(Celt) 원주민을 추방하였다. 잉글랜드의 카톨릭교도들은 모국정부에 의해 메릴랜드에 정착할 것을 허가받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