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 최초 등록일
- 2010.08.09
- 최종 저작일
-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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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
목차
1. 들어가며
2. 다산의 삶과 창작활동
1) 사환기
2) 유배기의 다산
3) 해배후(解配後)의 다산
3. ‘민(民)의 미학(美學)’에서 ‘조선시(朝鮮詩)’ 이론(理論)으로
4. 민(民)을 위한 시학(詩學), 현실주의(現實主義)의 진경(眞景)
5. 나오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의사회와 사상, 나아가 그 문학적 성취를 알고자 하면 다산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다산이라는 이름은 방대한 저작과 그 창조적 역량으로 부조(浮彫)되어 거인(巨人)으로 다가온다.
다산은 기호남인(畿湖南人)의 가계에서 출생하였다. 과거엔 명문이었으나, 다산대에 이르러 비교적 한미한 축에 들고 다산 자신도 그야말로 일개 재야(在野)의 선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가문(家門)의 후광(後光)이나 중앙의 정치적 배경이 전혀 없이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정조(正祖). 순조(純祖)를 거치면서 영광과 좌절을 경험하고, 험난한 사람을 창조적 작업을 통해 극복한 다산의 인생역정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맘껏 펼치던 사환기,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자신이 꿈꾸었던 야망이 좌절되었던 유배시기, 그리고 해배 뒤의 고향에 돌아와 창조적 학문으로 생을 정리하였던 해배 이후의 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 다산의 삶과 창작활동
1) 사환기
다산 정약용은 1762년 6월16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며, 그의 아명(兒名)은 귀농(歸農), 약용(若鏞)은 관명(冠名)이다. 자(字)를 미용(美庸) 혹은 송보(頌甫)라 하고, 호(號)를 사암(俟庵). 다산(茶山). 탁옹(籜翁)이라 불렀으며, 여유당(與猶堂)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다산은 유년시절 가학(家學) 전통에서 자란다. 15세에 서울로 유학하면서 주로 남인계 학자를 통해 접하고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학맥을 이어 받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가환. 이승훈 등,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자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