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먼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 동학에 대하여 살펴보자. 선교사 W. M. 젠킨스는 ‘코리안 리포지터리’라는 잡지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학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민중들을 사로잡았다. (중략)"
그는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만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동학에 대해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동학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후략)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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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청일 전쟁은 1894∼1895년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게 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청일 전쟁의 경과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다음해 부산에 거류지(居留地)를 설정, 곡물의 매점과 무관세(無關稅) 특권으로 공산품을 수출하며 조선에 진출하였다. 18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주병권(駐兵權)을 장악하고, 1884년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었다.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려온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봉기(蜂起)하여, 1894년 5월에 전주(全州)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 청 ·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서울에 주병(駐兵)한 일본은 조선 내정의 청 ·일 공동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일본의 단독개혁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진행 중이던 영국과의 조약 개정을 성공시킨 일본은, 조선이 청에 대한 복속관계의 파기와 청국군의 철병을 거절하자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억압하고,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에는 평양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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