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발해와 일본의 관계에 관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연구사 개괄
① 교류 성립기(727~752)
② 정치적 격변기의 교류(758~763)
③ 교류 질서 모색기(771~799)
④ 교류 풍성기(809~920)
Ⅲ. 발해 관련 기사
1) 《삼국사기》
2) 《속일본기》
3) 《속일본기》 外 일본 사서
Ⅳ. 발해와 일본의 외교 성격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주지하듯이 발해국은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에 건국한 나라이다. 926년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지금의 북한 지역과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일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있던 왕조였다. 건국자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이후, 15 왕이 220여년 간 이끌어 가면서, 한때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칭송될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영토의 북쪽은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및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에다 남족은 한반도의 북쪽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고, 대략 45만㎢에서 최대 59만㎢로 고구려보다 1.5~2배, 신라보다 3~4배 정도로 한국 역사상 최대의 권역을 갖추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발해국의 역사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구명된 것이 뚜렷하지 않다. 발해의 역사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 만한 기전체, 편년체와 같은 체계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 발해사 연구는 옛 발해의 권역인 중국, 북한, 러시아 등지에서부터 발해 유적 발굴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남한의 발해사 연구도 북한과 중국의 연구에 자극된 바가 컸다.
남한은 발해 지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1차 자료에 한계를 갖고 있고, 근본적으로 사료의 부족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비교적 발해 기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는 발해사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발해와 일본관의 대외관계에 관한 가장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8세기 후반 발해는 신라가 당과의 동맹관계 속에서 긴장관계를 느껴 일본과의 대외접촉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후 발해는 35차례의 사신을 보내고 일본도 15차례 정도 견발해사를 보낸다. 이것은 발해의 신라 관계, 혹은 일본과 신라 관계 보다 더욱 긴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발해와 일본 간에는 어떠한 관계하에 교류를 지속해 왔던 것일까.
본 글에서는 우선 양국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 개괄을 하고, 《속일본기》를 통해 발해에 대한 일본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연구사 개괄
앞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발해는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또한 발해를 13차례 방문했다. 이러한 횟수는 같은 시기 신라와 발해 간에 이루어진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와 일본 간의 교류와 비교 해 보더라도 훨씬 앞서는 것이다. 여기에 동해의 풍랑을 가로지르며
참고 자료
*학술지
구난희,1999,「8세기 후반 일본의 대외관계에 관한 고찰-발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이근우,2000,「《속일본기》의 역사서술과 특징」,일본역사연구제 12집,일본사학회
이병로,1998,「《속일본기》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신라․발해를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 제14권, 한국고대사학회
최재석,1991,「통일신라와 일본과의 관계」,정신문화연구 제14권,한국학중앙연구원
*단행본
고구려연구재단 저,2004,『발해사 자료집(상),(하)』,고구려연구재단
동북아역사재단 저,2007,『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김부식 저/이병도 역,1996,『삼국사기(상),(하)』,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