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과 교회의 수난
- 최초 등록일
- 2010.05.21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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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전쟁과 교회의 수난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 전쟁과 교회의 수난에 관한 자료입니다.
전쟁 발발의 배경
교회의 피해와 순교자들
손양원 목사의 순교
교회의 대처
본문내용
1. 전쟁 발발의 배경
연합국들의 승전으로 얻은 해방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원산항에 소련군이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진주한 소련군은 장교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정권을 세울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 일당이 공산당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하자 48년 12월 철수를 완료하였다. 미군 역시 유엔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철수를 시작하였다. 1948년 5월에 10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주한미군철수 반대집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고문단 500명만을 남겨 두고 이듬해 6월까지 완료하였다. 미국은 한국을 중무장시키면 북으로 쳐들어가게 되고 국제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판단하고 소총 정도의 무기만 공급하고 대포나 탱크 같은 것은 제공하지 않았다.
1950년 1월 12일. 6·25가 발발하기 불과 6개월 전에 미국 국무장관 딘 에치슨이 전국 기자클럽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션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며 한국은 이 방위선에서 명백히 제외되어 있어 한국에 군사적 공격이 생겨도 먼저 공격받은 국민이 저항하고 다음엔 유엔 헌장 밑에 전 문명 세계가 조치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곧 한국의 방위를 미국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서 북한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침략의 조건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던 발언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보병 10개 사단, 전차 242대, 항공기 211의 정예부대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남한에는 보병 8개 사단에 전차는 단 한 대도 없었고 항공기는 연습기 10대가 고작인 상태였다. 공산군들의 파죽지세는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막을 수 있었다.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16개 국의 군인들이 UN군의 이름으로 전투를 한 기이한 역사의 기록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1953년에 전쟁은 휴전선이라는 국경 아닌 국경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포성은 일단 그쳤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