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대장의 연구현황과 과제
- 최초 등록일
- 2010.04.15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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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호적대장의 연구현황과 과제-경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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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호적대장의 연구현황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민을 대상으로 각종 역을 부과하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호적대장을 개수하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었다. 호적은 호구단자(戶口單子), 호적대장(戶籍大帳 ), 준호구(准戶口)의 세 가지 형태로, 국가정인 행정문서였다. 민들은 자가(自家)의 호구 상황을 호구단자에 적어 보고하였고, 관에서는 이를 토대로 착오 여부를 확인하여 호적대장을 작성하였다. 호적대장에는 각 주호(主戶) 또는 솔거인의 직역, 성명, 나이, 본관, 사조의 직역과 성명, 가족의 직역, 성명과 나이 그리고 노비에 대한 사항 등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적대장은 당시의 가족구성, 인구, 신분, 혼인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여러방면 연구에 활용될 수 있다.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호적대장을 신분 관련 자료로 주로 활용하였으나 최근에는 일부 연구자에 의해 호적대장을 기층 민중의 생활사 자료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는 등 여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호적대장의 주호 직역(職役)만을 단순히 신분별로 통계 처리하여 조선후기 변동 양상을 밝히고자 하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1) 1970년대까지의 호적대장 연구 동향
조선후기 호적대장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사방박에 의한 대구부 호적대장 분석이었다. 그는 1690년부터 1858년까지의 대구부 호적을 50년 단위로 하나씩 선정하여 전체 호구 중의 각 신분별 변화상을 추적하였다. 그는 먼저 각종 직역을 상세히 검토하여 14개 부류로 나누고 이를 양반․상인․노비의 세 신분으로 분류하여 호주의 신분 변화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후대로 내려올수록 양반호가 증가하는 한편 노비호가 소실되고, 평민호도 19세기부터 격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방박의 이 연구는 비록 ‘이조사회의 붕괴에 관한 근본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호적대장 분석의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1960년대 들어 김용섭은 18세기 전반기 상주 지방의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을 함께 분석하여 이 지역 농민층의 신분 구성이 매우 다양함을 밝혔다.
참고 자료
백승종, 「戶籍이 말하는 민중의 삶」, 『한국시민강좌』22, 일조각, 1998.
김용섭, 「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童謠와 農地所有」,『史學--』15, 1963.
정석종, 「朝鮮後期 社會身分制의 變化-蔚山府」 戶籍大帳을 중심으로」,『大東文化硏究』9, 1969.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