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의 이름으로-신중현`을 통해 본 정치, 노래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0.03.21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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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이름으로: 신중현>을 통해 본 정치, 노래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한국 락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은 1962년 한국 최초의 락그룹 《에드 포》를 결성하여 락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는 《비틀스》가 빛을 보기도 이전으로 전세계적으로 락밴드가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비틀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에드 포》를 결성한 일은 그가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가 ‘한국 락의 대부’라 불리는 것은 단지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만이 아닌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가 1974년 발표한 「미인」은 단순한 5음계를 사용한 곡이었지만, 이는 일본식 5음계와는 다른 우리 전통의 계면조를 되살린 것이었다. 즉 가락에서는 우리의 고유 음계인 계면조를 사용했고, 리듬은 네 박자로 바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인 락을 탄생시킨 것이다.
<중 략>
지금까지 설명한 70년대 금지곡 사건은 가요계에 이루어진 ‘분서갱유’나 다름없었다. 신중현 등 시대를 앞서간 음악인들의 등장으로 막 싹이 보이기 시작한 대중음악은 싹이 잘리고 날개가 꺽여버렸고, 국내 대중음악은 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최근 보아나 비와 같은 가수들이 국제적으로 상당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점은 괄목할만하지만, 앞서 기술하였듯 우리의 대중음악이 이미 1960년대에 외국의 음악에 뒤떨어지지 않는 독창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금지곡 사건이 대중음악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쳤는지는 자명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금지곡 선정이 비단 유신정권 시대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80년대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때 정광태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곡을 발표해 우리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 정부를 자극한다는 외교적인 이유로 이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오랜 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탄생한 이후에도 금지곡 선정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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