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사(김옥균)
- 최초 등록일
- 2010.01.29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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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근대사(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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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저는 이번에 김옥균에 대해 조사를 하였습니다. 본관은 안동. 자 백온. 호 고균, 고우. 시호 충달.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 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1881년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 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과도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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