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인 번암 채제공에 대한 인물 조사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머 리 말
Ⅱ. 본 문
1. 생 애
1.1. 채제공과 영ㆍ정조
2. 정치 사상 및 정치 활동
2.1. 탕평정치
3. 경제 정책
3.1.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과
금난전권
3.2. 신해통공 정책
4. 서학에 대한 태도
Ⅲ. 맺 음 말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본문내용
Ⅰ. 머 리 말
번암 채제공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영ㆍ정조 대의 탕평정치와 개혁 시행에 있어 실질적인 역할을 주도한 정치가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당쟁과 정치적 권력관계 갈등의 시대에서 비교적 세력이 약한 편이었던 남인으로서 때로는 정계에서 축출당하기도 하지만, 좌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남인들의 정계진출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채제공의 정치적인 태도ㆍ활동과 함께 그의 업적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신해통공 정책, 또 서학에 대한 남달랐던 수용 태도 등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 문
1. 생 애
채제공은 1720년(숙종 46) 4.6에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1799년(정조23)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그의 가계를 대략 정리해 보면 그의 가문은 학식있고 덕망있는 이에게 제수되는 홍문관 등의 청직을 역임한 명망 높은 남인의 가문이었다. 번암은 이러한 학자적인 가문에서 성장하였지만, 그의 학문은 당쟁이 심한 시기에 처하여 관운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 같으며, 가재(家財)도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가세가 기울어져 끼니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러한 실세(失勢)해 가는 남인 명문의 후예로서 성장과정을 겪었던 환경이 그가 관직에 나아가 현실적이고 약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게 한 사상형성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채제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살펴보면 채제공은 1735년(영조11) 15세에 이미 향시에 급제했고, 8년 뒤인 1743년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예문관 사관, 충청도 암행어사, 이천도호부사, 대사간을 지냈다
1748년에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청요직인 예문관 한림을 선발하는 한림회권이 있었는데, 당시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 상황에서 소수파 남인을 추천하는 관료는 없었다.
참고 자료
김덕진,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 선인, 2002.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신연우ㆍ신영란, 『제왕들의 책사』, 생각하는백성, 2001.
정옥자 외,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9.
한철희,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2』, 돌베개, 2003.
김동철, 「蔡濟恭의 經濟政策에 관한 考察」, 釜大史學, 4-1, 1980.
신양선, 「朝鮮後期 正祖 연구」, 實學思想硏究, 4, 1993.
이욱, 「신해통공은 왜 유지되었는가」, 내일을 여는 역사, 9,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