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사회의 성격
- 최초 등록일
- 2009.10.25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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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한과 관련된 각종 논문을 읽고 성격대로 조합하여 정리한 글이다.
그 내용에는 삼한의 위치와 각 국가에 대한 문헌사료와 문헌사료에 나타난 각 국가의 성격, 문헌사료와 함께 볼 수 있는 고고학자료 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목차
Ⅰ. 문헌에 나타나는 한의 등장과 발전
Ⅱ. 변∙진한의 위치
Ⅲ. 변진한의 형성
Ⅳ. ‘국’의 구성과 계층화
Ⅴ. 삼한의 구분과 대외관계 -고고학자료와 비교하여-
Ⅵ. 문헌으로 본 일상생활과 제의 -고고학자료와 비교하여-
본문내용
Ⅰ. 문헌에 나타나는 한의 등장과 발전
- 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시경』韓奕篇에 보이지만, 여기에서 보이는 한이 한반도의 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한반도의 韓과 관련된 최초의 기사는 진의 陳壽가 쓴 『삼국지』의 ‘準王南奔記事’이다. 준왕이 내려온 시기는 기원전 198년이므로 적어도 이 시점 이후부터 한의 존재가 확인된다. 준왕의 남래는 한사회 내부에서 연맹체가 형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남래 지점에 대해서 다양한 설이 있으나 세형동검문화 관련 청동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익산설이 주류를 이룬다. 준왕세력은 위만조선과 통교하지 않았지만, 위만의 멸망 후 한지인들은 낙랑과 통교하였다. 통교한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염사치 .王莽(왕방)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우거수(右邊渠帥)로 있을 때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인민이 다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투항(歸化)하려 하여 자기의 읍락(邑落)을탈출(脫出), 순망중(巡亡中), 밭 가운데 새(雀)를 쫓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용어가 한인과 다르므로 이유(理由)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되, "우리는 본래 한인인데, 나의 이름은 호래(戶來)라 한다. 우리들 1천5백인이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인에게 잡히어 머리를 깍고 종(奴隸)이 된지 3년이 된다" 라고 하였다.
`치(鑡)`가 이르되 내가 지금 낙랑에 투항하러 가는 중이니 너도 같이 가지 아니 하려느냐?하매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호래를 데리고 낙랑 함자현(合資縣)에 이르러 사유(事由)를 말하니, 현에서는 곧 `치`를 통역(使譯)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대선(大船)을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와 호래의 항반배(降伴輩)를 내 놓아라 하여 생존자(生存者), 1천인을 얻었으나, 나머 것 5백인은 이미 죽었다. `치`가 진한(당국자)에게 이르기를 "네가 그 5백인을 마져 돌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에서 만병(萬兵)을 보내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칠 것이다. 진한(당국자)는 가로되 "5백인은
참고 자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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