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과 스키피오와 포에니 전쟁
- 최초 등록일
- 2009.09.14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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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스페인 문화와 예술
- 한니발과 스키피오와 포에니 전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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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포에니전쟁의 발달은 바로 시칠리아를 두고 시작이 되었다. 당시에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후였다. 당시 시칠리아는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남부의 레조의 사이에 있었다. 시칠리아의 서부는 카르타고의 식민지였으며 동쪽은 메시나와 시라쿠사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시라쿠사가 메시나를 공격하자 메시나는 불과 3km도 떨어지지 않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로마는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로마군이 메시나에 파견되자 시라쿠사와 카르타고는 동맹을 맺고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전쟁의 패배로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쪽지역의 재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더 큰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으나 뛰어난 무장인 하밀카르(한니발의 아버지)가 로마군을 잘 묶어두어 피해가 최소화 된 것이다. 전쟁후 하밀카르는 에스파냐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고 카르타헤나라 이름짓는다. 이곳에서 한니발은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다니며 강해진다. 당시 하밀카르는 로마군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 한니발에게 로마에 대한 복수의 맹세를 시키기도 했다.
한니발이 26세가 되던 해에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는 에스파냐에서 총독 하스드루발이 살해되었다.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를 통치해 왔지만, 한니발이 성장하기까지의 공백 기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기도 했다. ) 26세쯤 된 한니발이 정권을 잡기에는 부족한 나이가 아니였다. 에스파냐의 카르타고인은 그의 총독 취임을 만장일치로 인정했고, 본국 카르타고 정부도 그것을 승인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바로 이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에 의해서 시작이 된다. 로마인들은 당시 포에니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칠리아섬을 빼앗긴 카르타고는 서쪽의 재해권을 로마에게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바다로는 로마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또한 1차 포에니 전쟁 후 맺은 강화 조약 때문에도 로마와의 전쟁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교묘하게 로마가 아닌 사군토를 공략한다. 로마는 동맹도시를 위해 군대를 다시 보낸다. 한니발은 동생에게 에스파냐를 맡기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 본토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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