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
- 최초 등록일
- 2009.06.15
- 최종 저작일
-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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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토지개혁의 배경
가. 해방 전 토지소유관계.
나. 농민의 역할(개혁 주체로서의 농민)
다. 소련의 점령정책
2) 토지개혁의 시행
가. 농촌위원회
나. 토지개혁의 내용과 방법
본문내용
북한의 토지개혁
1) 토지개혁의 배경
가. 해방 전 토지소유관계
훈의 눈앞에 남이아버지네 올망졸망하니 많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 검게 자리잡은 큰 눈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큰애 하나는 해방 전해에 죽었다. 영양부족이었다. 남이아버지는 안주 수리조합 공사에 보국대로 뽑혀 나가고 없었다. 남이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날도 옥수수를 쪄가지고 순안 장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저녁 때 남이어머니가 돌아와 보니, 큰애의 움푹꺼진 눈과 반쯤 벌려진 입안에 파리 떼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미 죽은 지가 오랜 것이었다. 아래 아이들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자기네의 언니가 오늘은 하루종일 잠만 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해방 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과 반봉건적사회로 잔존함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중첩되어 일으킨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불균형한 토지소유관계로, 이것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북한은 평작 수준의 생산량이 주민들의 식량의 약 80%밖에 해결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체 농가 호수의 4%밖에 안 되는 지주가 총 경지 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중 대부분은 소작지이며, 소작인들은 5~60%의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논의 72.5%가 소작지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농민들이 반 기아 상태에 빠져있었다.
위의 표는 각 도별 농가 구성을 나타낸 것으로 자작농을 자작농은 26.3% 뿐이고 화전민이 5.3%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소작료를 지불하지 못하여 토지를 빼앗기고 유랑을 하거나, 같은 이유로 자신의 마을로부터 도망쳐 나온 이들이다. 이러한 사태가 늘어나자 지주들은 소작을 줄 때 연대보증제도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토지소유관계의 모순이 극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맞은 해방은, 농민들에게 있어 나라의 해방임과 동시에 살 길이 열리는 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인터넷, 토지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