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최초 등록일
- 2009.06.06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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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때 발표한 남한산성 관련 글입니다. 상당히 힘들여 작성했습니다 ㅜㅜ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2-1.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
1) 남한산성의 기원
2) 남한산성의 수축과 개축
2-2. 남한산성에 얽힌 설화
1) 벽력성의 정기가 얽힌 벌봉
3) 매바위 설화
2-3. 남한산성의 시설 및 건축물
1) 성곽
2) 옹성
3) 암문
4) 장대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성이란 외적의 침입이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성은 적이나 해로운 짐승을 막는 원시적 방어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후 농경·목축 등의 경제활동을 하면서 일정한 토지에 정주(定住)하게 되자 주거를 지키는 주거방어의 형태를 낳았고 주거의 집합체인 취락(聚落) 방위로 발달하였다. 목책(木柵)이나 해자등이 발전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곽(城廓)은 내성(內城)을 의미하는 성(城)과 외성(外城)을 의미하는 곽(廓)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즉 성곽은 일정한 영역안의 생활인들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로부터 평안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하여 만든 인위적인 시설물을 말한다.
성은 시대가 발전하고 그 위치에 따라 목적이나 기능, 형태가 달라졌다. 최초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은 성읍국가(城邑國家)의 단계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나라(國)의 의미를 띄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본래의 방어기능에 더하여 왕권의 상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왕권과 국가의 상징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또한 토성(土城)보다 목책이 우선하였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무기가 발달하면서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출현하였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토성이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석성(石城)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고구려가 북방의 민족들과 대립하며 쌓았던 견고한 성곽의 축성기법이 백제 신라로 전파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보다 효과적인 축성기법이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은 산성(山城)이 평지의 도성(都城)을 유사시에 대비하는 성으로 발달한 특징을 보인다. 평시에는 평지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전쟁이나 내란 시에는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1.『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홍경모.『중정 남한지(重訂 南漢志)』
3. 김부식 저, 이강래 교감.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길사. 1998
4. 김상익, 김성준, 윤우준. 『남한산성 행궁지-발굴조사 보고서』토지박물관. 1999
5. 이중환 저, 이익성 역. 『택리지 : 한국 풍수지리학의 원전』. 을유문화사. 2002
6. 차용걸 저. 『한국의 성곽』. 눈빛. 2002
7. 반영환 저. 『한국의 성곽』. 대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