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에 대한 평가
- 최초 등록일
- 2009.05.15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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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군부정권에서 언론의 자유를 외쳤던 장준하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언론인 장준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목차
Ⅰ. 왜 장준하인가?
Ⅱ. 장준하, 그가 가졌던 고민
Ⅲ.『사상계』, 그 탄압의 나날들
본문내용
Ⅰ. 왜 장준하인가?
일제 때는 항일 독립운동. 자유당 때는 『사상계』를 통한 민주주의 교육과 인권운동. 군사독재 때는 민주회복과 통일운동을 주도하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생애를 살았다. 장준하 선생의 올곧은 생애는 흙탕물 같은 우리 현대사의 연못에 핀 한 떨기 연꽃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민족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총을 들고 왜적과 싸웠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는 붓을 들고 청년ㆍ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사상을 가르쳤다. 군사독재에 헌정질서가 짓밟히자 붓을 던지고 거리에 나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웠다. 그는 남들이 안일을 택했을 때 항일전선과 독재의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청렴한 사생활과 강직한 공생활로 민주의 사표가 되고 겨레의 스승이 되었다.
장준하(1918~1975)는 이미 ‘역사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각 분야마다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하가 일생 동안 가장 많은 시간과 정열을 바치고 업적을 남긴 곳은 역시 언론 분야이다.그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사상계』의 발간이다. 장준하는『사상계』를 통해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 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하였다. 이러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기에, 『사상계』는 독재세력의 탄압 속에서도 시련을 견뎌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에 비겁한 언론은 침묵하거나, 심지어 쿠데타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정희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고, 언론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그 때문에 군사정권과 유착한 언론이 늘어갔고, 비판을 하더라도 박정희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비켜나갔다. 그러나 박정희를 용납할 수 없었던 장준하만은 『사상계』를 통해 5ㆍ16을 비판하고 민정회복을 촉구하였다. 장준하의 정론정신. 이것이 바로 그를 빛나게 하는 이유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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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2003).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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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정기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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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2004). <김삼웅의 정론직필 언론인 수첩(3) 장준하>. <<인물과 사상 2004년 4월호>>
장준하(1953). <사상계 1953년 5월호>
장준하(1960). <사상계 1960년 4월호>
장준하(1965). <사상계 1965년 6월호>
장준하(1966). <사상계 1966년 10월호>
장준하(1966). <사상계 1966년 11월호>
이태주(1993). <언론 : 장준하 죽음 의혹 공방의 진실>.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제93호>>